S#1 최근 <포비든 킹덤>의 홍보를 위해 베이징에서 기자 간담회를 연 성룡과 이연걸은 논란이 되고 있는 올림픽과 중국 관련한 질문에 대해 상반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도 성룡은 티벳사태와 관련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의견을 피력한 반면, 독실한 불교신자로 알려진 이연걸은 티벳 사태나 베이징 올림픽과 관련한 질문은 일절 받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S#2 <포비든 킹덤>의 일반 시사회장, 젊은이들이 대부분이던 극장 안에 유독 한 쌍의 중년 부부가 눈에 띄었다. 그들 중 주위 시선을 아랑곳 않던 남편은 상영 시간 내내 부인에게 성룡과 이연걸의 ‘무협’ 대결의 내용을 설명하기 바빴다. 아마도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던 그 중년 남성은 ‘외팔이’ 왕우와 ‘브루스 리’ 이소룡을 거쳐 ‘주먹코’ 성룡과 ‘소림사’ 이연걸로 이어지는 무협 스타들을 섭렵해왔던 전형적인 남성 팬이리라.
S#3 5월 초 개봉하는 <스피드 레이서>에서 조연을 맡은 ‘비’ 정지훈은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 자리에서 워쇼스키 콤비가 제작하는 <닌자 어세신>에 주연급으로 캐스팅됐음을 밝히며, 이 영화가 동양적(?)인 무협 영화에 가까울 것이라고 예고했다. 또한 메이저 스튜디오 드림웍스는 중국의 마스코트 팬더가 쿵푸를 배운다는 내용의 애니메이션 <쿵푸 팬더>를 올 여름 대대적으로 전세계 배급한다. 잭 블랙, 안젤리나 졸리 등 특급 스타와 함께 구색에 맞춰 할리우드의 중화권 대표 배우 성룡, 루시 리우를 목소리 배우로 캐스팅했다.
할리우드가 접신한 ‘무협 코드가 불러온 변화
<포비든 킹덤>을 둘러싼 이 세 가지 장면은 꽤나 폭넓은 시각을 조망케 해준다. 우선 <포비든 킹덤>이 홍콩에서 출발, 전세계적에 팬을 거느리게 된 두 액션스타를 내세우고 중국과 미국, 한국 등 다국적 스탭들을 규합한 7천만 달러짜리 할리우드 영화라는 걸 염두에 둘 것.
먼저 성룡과 이연걸의 입장 차이는 개인의 정치적, 종교적 견해 차이일 뿐이다. 매일 같이 카드 광고에 등장해 베이징 올림픽을 홍보하는 성룡과 달라이 라마를 직접 만나기도 했던 불교 신자 이연걸의 영화외적인 간극.
그랬거나 말거나 <포비든 킹덤>은 북미에서 4월 셋째 주에 주말 2,000만 달러를 거둬들이며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중국이 티벳을 억압하거나 말거나, 성룡이 중국 홍보 대사를 자임하거나 말거나, 미국 관객들은 두 액션스타의 활극에 기꺼이 90분의 시간을 내주고 입장료를 지불한 것이다.
고전 <서유기>를 차용한 <포비든 킹덤>은 비록 표피적이고 각색된 시각일지라도 중화권 문화의 첨병으로 기능할 것이다. 그것이 비단 <서유기>와 ‘무협’ 액션, 두 액션 스타에 대한 관심에 불과할지 몰라도, 전세계 관객들이 보는 것은 일단 중국의 고비 사막과 둔황, 우이산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다. 시기상으로 베이징 올림픽 공식 홍보 영화처럼 보이는 이 작품의 최대 수혜자는 중국 당국일 것이다. 마치 손 안대고 코 푼 격이랄까.
두 번째 무협 아이콘. 80, 90년대에 성룡은 이소룡을 잇는 차세대 액션 아이콘이었고, 아시아를 주름잡는 흥행 보증수표였다. 중국에서 건너 온 이연걸은 중국 무술 대회 출신인 전통파로 <황비홍> 이후 ‘무협’ 영화 대표배우로 자리 잡았다. 경극 학교 출신인 성룡이 잘 짜여진 합과 아크로바틱한 코믹 액션을 장기로 삼았다면 이연걸은 선 굵은 쿵푸를 장기로 삼아왔다.
중국 무협 영화의 계보를 잇는 두 배우의 ‘역사적인’ 첫 번째 조우는 잠자고 있던 전세계 옛 홍콩 무협 영화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해 보이며 마케팅의 초점에 여기에 맞춰져 있다. <포비든 킹덤>은 엄격한 외국영화 쿼터제를 적용하는 중국을 제외하고 아시아에서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시작으로 한국과 홍콩에서 순차적으로 개봉한다. 한국과 동남아시아는 옛 홍콩 영화의 금맥과도 같은 시장이었음을 상기해보자.
마지막으로 할리우드의 무협코드에 대한 애정 공세. 원화평 무술 감독이 참여한 <매트릭스>와 <와호장룡>이 일으킨 미국 내 무협 액션에 대한 열광은 타란티노의 <킬빌>로 방점을 찍었고, 지극히 미국적 장르인 3D 애니메이션 <쿵푸 팬더>가 나오는 지금에 이르렀다. 미국 내에서 B급 마니아들을 열광시켰던 홍콩 무협물이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에 의해 미국식으로 재창조 되는 순간을 맞은 것이다.
물론 이건 명백히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시장을 노린 포석이기도 하다. <닌자 어세신>의 액션 연기를 위해 몸만들기에 한창이라는 정지훈이 여러 인터뷰에서 <스피드 워리어>의 캐스팅이 할리우드가 아시아 시장을 염두에 캐스팅이란 걸 솔직히 인정한 것도 시사적이다. 돈 되는 시장과 소재에 발 빠르게 움직이는 할리우드의 영민함이 이제 성룡, 이연걸을 대체할 인물들을 찾고 있는 셈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런드리 워리어>의 장동건,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의 전지현, <G. I 조>의 이병헌은 아시아 시장을 위한 포석인 동시에 ‘액션’을 소화해야 하는 캐릭터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연기하고 있다. 그 ‘액션’이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더할 나위 없이 친숙해진 중화권의 ‘무협’ 액션이 될 거란 점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지점이다.
‘무협’ 액션과 만난 <반지의 제왕>
서론이 길었다. 이러한 산업적인 배경을 메모리에 입력하고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영화의 오프닝, 손오공으로 분한 이연걸이 천상에서 하늘을 날으며 병사들과 싸움을 벌인다. 다소 튀는 CG로 덧칠된 천상을 배경으로 <서유기>의 간략한 스토리를 친절하게 설명하는 성룡의 영어 나레이션이 깔린다.
뒤이은 타이틀 시퀀스. 주인공 소년 제이슨(마이클 안가리노)의 방에 붙여진 옛 홍콩 영화들의 포스터를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취권2>에 출연했던 무술감독이자 배우인 유가량, <킬빌2>에서 우마 서먼의 스승이었던 유가휘, ‘외팔이’ 와우와 이소룡 등이 차례로 스쳐가고 음악 또한 향수를 불러일으킬 그 때 그 노래다. 그러니까 <포비든 킹덤>은 홍콩식 무협물에 애정을 바치는 판타지물이라는 걸 시작부터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내용은 마니아들이 아닌 가족 관객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고대 중국을 배경으로 한 ‘여의봉 원정대’랄까. 쿵푸 영화 마니아인 ‘고딩’ 제이슨(마이클 안가라노)이 차이나타운의 한 가게에서 여의봉을 발견한 뒤 빨려들어 간 곳은 미지의 ‘포비든 킹덤’. 손오공이 라이벌 제이드 장군(예성)의 저주로 봉인되어 있는 <서유기>의 세계다.
정신을 차린 제이슨은 무술의 절대고수 루얀(성룡)과 '란(이연걸)을 만나 자신이 500년 전 봉인된 손오공의 저주를 풀 예언의 인물임을 알게 되고 곧 수련에 들어간다. 이후 제이슨과 두 사부, 그리고 제이드 장군에게 부모를 잃은 골든 스패로우(유역비)가 함께 떠나는 여정과 제이드 장군과의 대립, 로맨스 등이 적절히 녹아 들어가 있다.
<포비든 킹덤>의 관람등급은 공히 12세 관람가. 이 판타지 무협물은 그러나 서양 관객들의 입맛을 거스르지 않는 ‘고딩’ 제이슨의 성장물이자 <반지의 제왕>식의 모험물이다. ‘반지 원정대’가 절대 반지를 없애기 위해 떠나는 여정을 손오공에게 여의봉을 건네주려는 여정으로 바꿔치기 해 놓았다.
혹자들은 중국으로 날아간 제이슨과 만나는 인물들이 느닷없이 영어를 내뱉는 설정이 껄끄럽다고 투덜대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정도를 할리우드의 오만이라고 한다면 외계 로봇이 영어를 쓰는 <트랜스포머>나 한국의 이무기가 하필 LA에 재림한다는 <디워>의 설정은 뭐라고 할 텐가.
여기서 <포비든 킹덤>이 판타지란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그것도 철저히 가족 관객들에게 눈높이에 맞춘 판타지. 코믹한 성룡, 진지한 이연걸의 기존 이미지를 가져오는 동시에, 서양식 판타지 전후 맥락에 <서유기>의 설정을 꿰맞추고, 10대의 성장드라마를 과다하지 않은 액션 묘사에 버무리는 능수능란함. <킬빌>의 야심 차고 독창적인 오마주를 바란 성인 관객이라면 다소 실망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현재의 10대들과 부모세대는 낯선 세계에 불시착한 제이슨의 심정으로 편안하게 영화를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40대 이연걸과 50대 성룡의 맞대결
1954년생인 성룡과 1963년생인 이연걸. 우리 나이로 이제 55살과 44살이다. 이제 그들은 어느 장면에서 스턴트맨을 썼는지 대번에 알아볼 정도로 노쇠했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액션은 여전히 경이롭다. "서로의 리듬만 확인하면 NG없이 베스트 장면을 뽑아내며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는 말은 홍보를 위한 수사로 치더라도 <포비든 킹덤>은 무협 마니아라면 두 사람이 맞붙는 액션 시퀀스만으로도 관람료를 지불할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두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붙는 시퀀스는 <영웅>에서 견자단과 이연걸이 보여줬던 액션의 합을 뛰어 넘는다.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영웅>의 액션 신이 와이어와 슬로우모션의 빈번한 사용으로 스타일에 치중했다면 <포비든 킹덤>은 좀 더 사실적으로 합에 포커스를 맞춰 젊은 시절 그들의 젊은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제자 제이슨을 수련시키며 자신의 성격에 맞게 공격과 수비에 적합한 학권, 사권 등을 주장하는 장면 또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취권’과 경찰의 이미지가 강했던 성룡과 현대극보다는 장삼풍, 방세옥, 황비홍, 곽원갑 등 정통 ‘무인’ 영웅으로 각인됐던 이연걸. 그간 그들이 이뤄내지 못했던 대결을 할리우드의 자본과 시나리오, 기술력이 실현시켜 준 셈이다. 영화 속에서 둘의 캐릭터는 ‘취권 마스터’과 ‘소림 승려’라는 신분과 함께 유쾌하고 엄격한 성격의 차이를 뒀다. 그들이 영화 속에서 어필해왔던 이미지를 고스란히 가져 온 것 또한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이들의 중심에는 물론 무술 감독 원화평이 버티고 서 있다. <매트릭스>, <와호장룡>, <킬빌>로 이어지는 할리우드에서의 필모그래피는 우아함을 강조한 ‘원화평식 액션=무협’ 이란 공식을 전세계 영화팬들에게 각인시켜 준 바 있다. 또한 장철 감독 아래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일찌감치 성룡과는 <취권>과 <사형도수>로, 이연걸과는 <태극권>, <황비홍> 등에서 호흡을 맞춰왔다는 것도 흥미롭다. <포비든 킹덤>은 고전과 액션스타, 그리고 할리우드의 기획력이 조화를 이루는 ‘무협’ 영화의 현재형인 셈이다.
여름 블록버스터 시즌을 여는 가족 영화, 성공할까?
<포비든 킹덤>은 할리우드의 문어발과도 같은 세계화 전략을 흥미롭게 반증한다. 그들은 거대 예산을 가지고 자신 있는 영역(모험 판타지)에 지역적인 고전과 특수한 장르(<서유기>와 무협)의 코드를 끌어들이고, 거기에 제3국의 기술력을 입혔다(<포비든 킹덤>의 CG는 <중천>의 매크로그래프와 <세븐 데이즈>의 DTI, <기담>의 푸티지에 등 3개 국내 업체가 맡았다).
“카리스마 넘치고 살아있는 듯한 인물들의 모험이라는 스토리와 성룡, 이연걸의 캐스팅까지, <포비든 킹덤>은 내 인생 최대의 행운이다”라고 밝힌 롭 민코프 감독은 <스튜어트 리틀>과 <라이온 킹> 등 가족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연출한 인물. 이질적인 각 요소들을 아이들부터 무협 영화에 향수를 지닌 장년층까지 아우르는 전략의 일환으로는 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포비든 킹덤>을 대하는 자세는 이 두 가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장르 팬들이라면 일정부분 향수에 젖어 할리우드의 영악하지만 관습적인 시도들을 느긋하거나 두 눈 부릅뜨고 바라보는 것. 휴식과도 같은 오락을 즐길 심산으로 극장을 찾았다면 덜 진지한 <반지의 제왕>의 ‘성룡식’ 버전쯤으로 여기고 90분을 보내시길. 혼성모방과 오마주, 할리우드의 세계화 전략이 넘실거리는 <포비든 킹덤>을 어떻게 즐기느냐는 그야말로 관객의 취향과 기호에 달려있으니까.
2008년 5월 2일 금요일 | 글_하성태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