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부의 명에 따라 남쪽 페광을 사수하는 구지디 휘하의 소대원 47명은 썰물처럼 밀려오는 적들과 용감하게 맞서지만 화력에 밀려 사상자는 속출한다. 그러던 중, 열세에 밀린 소대원들은 퇴각 나팔소리, 즉 ‘집결호’를 들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듣지 못한 구지디는 그들과 반목하다가 결국 자신의 신념대로 사수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 전장에서 홀로 살아남게 된 구지디는 여생동안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구지디(장한위)를 중심축으로 전후반 구조를 구성하는 <집결호>는 생생한 전장의 대기를 포착하는 전반과 구지디의 집념을 담은 개인적 서사로 이뤄진 후반으로 나뉘어 있다. 일단 <태극기 휘날리며>를 작업했던 국내특수효과팀이 참여한 <집결호>의 전쟁씬은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보여지던 전쟁씬의 중국발 재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리얼리티에 입각한, 유사한 질감을 선사한다. 이는 내전이란 유사한 성격을 지닌 한국전쟁과 국공내전이 서사적으로 근접해 있는 동시대적 사건이란 점에서 두 전장의 묘사로부터 흡사한 질감이 포착되는 건 다른 환경에서 벌어지는 동시대적 기운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이색적이기도 하다. 게다가 중반부에서는 실제로 한국전쟁에 참여한 중공군이 한국군 복장으로 횡성에 침투했다가 우연히 마주친 미군에게 어색한 한국어로 위장하는 특별한 장면도 등장한다.
전장터의 참혹한 풍경을 전시하는데 러닝타임의 절반을 할애한 <집결호>의 본색은 후반부에서 드러난다. 뉴스에 나온 실제 인물에 대한 모티브가 집필에 영향을 끼쳤다는 ‘양 징유안’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한 <집결호>는 실화를 밑그림으로 하고 있다지만 찰나의 모티브에 픽션의 뼈와 살을 바른 원작소설과 마찬가지로 영화 역시 중국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에픽에 가까운-혹은 불과한- 작품이다. 결국 <집결호>는 실화의 재현보단 가상의 연출을 통한 주제의식의 관철과 함양에 목적을 둔 계몽적 고지를 점령하고자 한다. 전반부의 아찔한 핸드헬드가 <집결호>의 살을 바르는 작업이라면 후반부의 무덤덤한 고정숏들은 <집결호>의 뼈대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하지만 참혹했던 기억을 바탕으로 한 개인의 사연은 설득력 있는 수긍을 노리기보단 동정심을 유발하는 형태에 가깝다. 특히 구지디의 결연한 충성심은 국가의 전체주의를 결속시키고자 하는 인민주의적 의식소양에 대한 어떤 혐의를 불러일으킨다.
홀로 살아남은 그가 주검이 되어 묻힌 부하들의 명예를 회복해주고자 동분서주하고 결국 과거 폐광의 자리에서 홀로 일인 시위하듯 땅을 파다가 국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죽은 이들의 명예를 회복한다는 식의 스토리는 결국 <집결호>가 국가적 위안만이 개인의 존엄성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논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전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무명(無名)이 된 전우들의 이름을 찾아주겠다는 구지디의 의지가 국가라는 전체주의적 이기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귀속으로 점철될 때, 개인의 숭고함은 사회주의적 맥락의 결연한 단합으로 승화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결국 <집결호>는 개인주의적 존엄성을 가장한 전체주의적 결속의 의도에 접근해있다.
집결호를 듣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구지디가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자의 고통을 드러내는 과정은 어느 가혹한 체제의 하위적 일방성이 개인의 생존력을 무력화시키는 잠재된 폭력적 작용을 구체화시킨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또한 들리지 않았던 나팔소리가 들릴 수 없었던 나팔소리였음을 깨닫게 되는 구지디가 죽은 상관에게 분노를 표출하다 결국 용서를 표하고 스스로를 달래는 모습은 삶이란 죽은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산 자를 위해서 끊임없이 명복을 빌어야 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이 지점에서 <집결호>는 죽음을 향해 무력하게 걸어가는 인간의 삶이 하릴없다 할지라도 허락되는 삶의 여정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되새기게 한다. 그래서 수없이 널브러진 죽음의 잔해가 넘실거리는 전장의 한가운데에서도, 혹은 전장을 벗어나서도 그들은 끊임없이 먹고, 마시며, 피워댄다. 삶이란 그렇게 방향을 잃었다고 생각되는 순간조차도 나침반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담담한 교훈이 전체주의적 역사계몽의식 함양에 종속되는 듯한 결말은 도피적이라 씁쓸하다. 역사적 소명에 묻어버린 개인의 상흔은 그만큼 덧없이 흩어져 날려버려야 하는 것일까. 물론 그것이 중국인들이 대면하는 현재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2008년 2월 26일 화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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