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뱃속에 아기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16살 소녀 주노가 부모님 앞에 섰다. “아길 가졌어요.” 너 죽고 나 죽자는 엄마의 곡소리도, 뒷목을 부여잡으며 몽둥이를 찾는 아빠의 모습도 없다. 주노의 선언에 눈을 깜빡이던 아빠는 어수룩해 보이는 소년 블리커가 아기의 아빠라는 이야기를 듣곤 “굼벵이도 구른다더니”라며 농담을 던진다. 아빠보다 현실적인 새엄마는 아이를 낳아 양부모에게 맡길 거라는 주노의 선언에 “다부져서 좋구나. 비타민 약부터 챙겨먹자”고 침착하게 얘기한다.
그렇다. 영화 <주노>는 10대 소녀의 임신을 소재로 한 영화다. 하지만 <주노>는 기존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얘기하고 바라보는 영화다. 즉 10대 소녀의 임신이라는 묵직한 사회 문제를 소재로 다룬다고 해서 낯간지러운 교훈조의 사회드라마 혹은 억지눈물을 강요하는 신파조의 멜로드라마로 오해해선 곤란하단 말씀이다. 온 몸을 쿨함으로 무장한 독특한 소녀 주노의 이야기에 집중하다보면 분명 나도 모르는 사이 절로 유쾌한 웃음을 지으며 더불어 가슴 속 깊은 울림까지 느끼게 될 테니 말이다.
영화는 임신이라는 구체적인 사건보다는 16살 소녀 주노가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고 낳기까지 1년여의 시간을 들여다보며 그녀 주변의 소소한 이야기에 집중한다. 딸만큼 쿨한 아버지와 든든한 지원군인 새엄마, 엄마가 되기 위한 준비를 마친 예비 양엄마, 아직 어른이고 싶지 않는 예비 양아빠, 그리고 어수룩하면서 순진한 주노의 남자친구 블리커 등 주노 주변을 메우고 있는 가족과 친구들의 소박한 이야기들을 있는 그대로, 마치 수다라도 떨듯 친근하게 그려낸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찬찬히 그리고 진득하게 담아내는 이 소박함은 영화를 이끄는 큰 힘이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질 법한 소박한 사건들은 관객들에게 현실성을 부여하기 충분하며 여기에 재기발랄한 대사가 더해져 생생함을 부각시킨다.
감독은 임신이라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한 이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임신과 출산, 입양의 과정을 통한 소녀의 성장을 밝은 시선으로 담아내며 그 성장을 통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 자연스럽게 접근한다. 그리고 주노는 이 일련의 성장 과정을 거치며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슴으로 느끼며, 결국 그 실체를 찾아낸다.
영화를 본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쿨 할 수만 있는 거지?” 영화는 분명 우리들이 딛고 서 있는 현실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주노>의 사람들은 그들이 당면한 문제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침착하고 쿨하다. 일례로 산처럼 부풀어 오른 배를 한 주노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외려 학교에서 그녀는 “살아있는 교훈”으로 통한다. 어떻게 그렇게 쿨 할 수만 있냐고? 필자 생각은 이렇다. <주노>는 우리들이 머릿속에 그려놓은, 우리들이 꿈꾸는 그 세상을 그려내고 있다. 몰아붙이기 보다는 감싸 안고 귀기울여주는 세상, 주노처럼, 주노의 친구들, 그리고 부모처럼 모두가 손 붙잡고 걸을 수 있는 세상. 유치하지만 한번쯤 꿈꿔보는 세상이 아니던가. <주노>는 그렇게 긍정의 힘으로 이루어진 판타지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2008년 2월 20일 수요일 | 글_나하나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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