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현장 공개는 영화 기자들에게 쥐약이다. 일간 매체의 경우 일요일 근무면 상관없지만 주간지나 여타 매체야 그야말로 휴일 아닌가. 뭐, 글이야 각자 틈틈이 쓰기에 휴일이 없는 지적 노동자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빨간 날인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모던보이> 현장 공개가 잡힌 18일은 올 가을 들어 가장 추운 날씨. 수은주가 영하로 떨어졌단다. 직업정신은커녕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러기를 한 시간, 한파를 뚫고 달려간 경기포 파주 아트서비스 세트장. 복층으로 구성된 세트장을 들어가기 직전 슬리퍼를 나눠준다. 목재 바닥이라 더러워지면 낭패라나 뭐라나.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 호들갑이야’란 불평도 잠시, 2층으로 구성된 세트장을 들어서니 기자들의 탄성이 쏟아진다. 우선 시선을 압도하는 1층 150평, 2층 50평의 세트 규모다. 몽환적 분위기를 위해 피워 올린 매케한 스모그 사이로 재현된 1937년 경성의 비밀 지하 댄스 구락부. 일본산 삿뽀로 맥주부터 다양한 양주와 와인병, 세심하게 장식된 촛대와 데카당스한 분위기를 완성시키는 갖가지 형광등까지 당장 영업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실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라는 신문 기사가 났을 정도라는 당시 경성의 모던함이 이 정도였을까 짐작하는 사이, 제작비 77억에 대한 의혹도 눈 녹듯 사라진다. 할리우드 여배우들을 연상시키는 드레스는 물론 기모노와 중국풍 원피스 등 갖가지 의상도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이 때, 화려하고 퇴폐적인 ‘모던’ 바에 스윙재즈가 울려 퍼지고 이날의 주인공 김혜수 등장. 취재진과 스탭들의 눈과 귀가 온통 바 중앙으로 쏠린다.
검은색 턱시도도 김혜수의 섹시함을 가릴 수는 없는 법. 남성 댄스단과 격렬하고 역동적인 춤사위를 펼쳐 보이는 김혜수의 몸짓이 예사롭지 않다. 몇 번의 테스트를 무사히 마치고 취재진을 위해 깊게 눌러썼던 모자를 벗어던지자 야릇한 미소와 눈빛이 압권이다. 댄스단의 대리가수부터 댄스단 리더까지 다양한 직업으로 미스터리한 매력을 뽐낼 조난실 역할을 위해 “3개월간 전문가들에게 춤과 노래를 전수받았다”는 김혜수의 열정이 200% 발휘되는 순간이다.
바 2층에서는 박해일과 이한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여기자들의 로망일 뿐 아니냐고? 30년대 과연 가능했을까 싶은 박해일의 헤어스타일을 보라. 아줌마 파마와 더불어 핑크색 양복이 파격을 더 한다. 그 옆 일본인 신스케 역의 신예 이한은 검은색 슈트와 완벽하게 빗어 넘긴 기름진 헤어와 콧수염으로 당대 자료에서 보아왔던 ‘근대인’이 걸어 나온 듯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해명, 신스케! 큐 사인을 음악에 맞출 테니 알아서 타이밍을 맞춰보세요.” 존대 말을 고수하는 점잖은 정지우 감독의 주문에 따라 두 사람이 2층에서 연출해 낸 장면은 조난실, 김혜수를 처음 발견하는 감격적인 순간. 남장을 했음에도 숨길 수 없는 조난실의 은밀한 매력에 감탄한 이해명. 그 순간의 감격을 박해일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잡아먹을 듯 껄렁한 눈빛을 자아내며 감독의 오케이 사인을 받아낸다.
이쯤 되자 소품으로 준비된 탁자에서 앉아 세트장을 둘러보던 기자, 당시 손님이라도 된 듯 착각에 빠질 만 하다. 이 정도의 세련된 댄스장에서 운명적인 여인을 만날 수 있는 상류층 인사로 태어난다면 아무리 식민지 상황이라도 한 번 살아볼만 한 거 아냐? 아마도 정지우 감독이 관객들에게 던지는 문제의식이 바로 그 지점일 듯 싶다.
<해피엔드>, <사랑니> 등으로 진중한 시선을 견지해 온 정지우 감독의 세 번째 작품 <모던보이>는 소재와 규모, 캐스팅으로 일찌감치 충무로의 기대작으로 떠오른 작품이다. 제5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한 이지형의 소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수 있겠니>를 원작으로 1937년 경성의 모던보이, 모던걸과 당대 젊은이들의 삶을 그린다. 조선총독부 서기관으로 근무하는 로맨티스트 이해명(박해일)이 비밀구락부에서 한 눈에 반한 여인 조난실(김혜수)을 만나 벌이는 꿈같은 연애와 해명의 성장 과정을 통해 그간 선입견에 젖어 왔던 식민지 시대의 생활상을 기발한 상상력과 발칙함으로 그려낼 예정.
“먹고사는 문제가 거의 해결됐지만 식민지 상황이 고착돼 미래가 없는 암울하고 답답한 상황”이라고 고 1937년을 정의하는 정지우 감독은 “그 속에 퇴폐하고 음란한 문화가 생성됐던 독특하고 흥미로운 첫 번째 시기다. 표피적이고 소재적으로 접근할 생각은 없다. 해석하고 고민하고 성찰이 담긴 캐릭터로 분명히 다른 영화를 보여 드리겠다”는 자신감을 피력한다. 껄렁한 젊은이 이해명이 변화하는 “일종의 성장영화”라는 <모던보이>는 또 제작비의 상당 부분을 시대를 재현하기 위한 세트와 CG 작업에 투여, 당대의 시대상을 세심하게 재구성한다는 각오다.
댄서, 양장점 디자이너, 가수 등 다양한 직업과 열개가 넘는 이름, 그야말로 미스터리란 단어가 적격인 조난실이란 캐릭터는 고스란히 근대와 식민지 조선이라는 경계를 표상할 인물. “시나리오 작업 내내 조난실을 누가 연기할 수 있을까 답답했다”는 정지우 감독의 시름을 덜어준 이가 바로 김혜수다. <타짜>이후 선택한 첫 작품이라는 김혜수는 “분장, 미술, 의상 등 영화계 최고 스탭들이 모여 영화적인 새로움을 곁들이고 있는데 그 혜택을 고스란히 받고 있다”며 기대했던 정지우 감독과의 작업에 만족감을 표현한다.
캐스팅에 우여곡절이 많았던 김혜수에 비해 일찌감치 이해명 역으로 낙점된 박해일은 <소년, 천국에 가다>에서 보여줬던 그 천진난만함에 발칙함을 더 한다. 죽어도 로맨티스트로 남고 싶은 이해명 역을 위해 우선 파격적인 헤어스타일이 눈에 띄지만 외양적인 파격이 전부는 아닐 터. “지금의 해일씨 그 시선 그대로 시대에 뛰어 들어가는 건 어떨까라는 감독님의 제안대로 재미있게 연기하고 있다”는 박해일은 “껄렁한 1차원적 이미지 내면에 인물에 대한 물음을 인지하고 촬영 중이다”라며 진지함을 잃지 않는다.
“현실에서 행복 하고픈 남자가 불우한 시대를 어떻게 이겨 내는가”에 대한 이야기인 <모던보이>는 갑작스레 찾아온 한파를 뚫고 11월 말까지 모든 촬영을 마칠 예정. 과연 ‘모던보이’ 이해명이 식민지 현식을 극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해답은 2008년 초에 스크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2007년 11월 21일 수요일 | 경기도 파주_하성태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