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서도 안되고 봐서도 안되며 말해서도 안 된다는 궁녀의 삶을 귀머거리 3년, 봉사 3년, 벙어리 3년이라 했던 며느리 시집살이의 고됨과 비교할 수 없는 건 그녀들이 국가와 동일시되던 왕의 옥채를 보전하는 막중한 책무를 행하는 동시에 살벌한 금기에 묶여있는 까닭이며, 이로써 생사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긴장감을 발생시키는 덕분이다. 동시에 금기의 내부에서 그녀들에게 봉인되었을 무언가에 대한 호기심은 매력적인 의문을 증폭시킨다. 또한 절대 권력의 변두리에서 그림자처럼 존재했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란 점도 귀를 솔깃하게 한다. 동시에 풍문처럼 들리는 그림자 같은 집단의 내부를 들여다 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묘한 매력을 지닌다.
만약 <궁녀>가 표방한 궁중 미스터리란 타이틀로부터 기대감을 얻었다면 결말에 다가설수록 배신감을 느끼게 될 법하다. 내의녀 천령(박진희)의 추리를 통해 의혹을 파헤치는 지적 구조의 스릴러적 전개는 중반을 넘어서며 엄습하기 시작한 호러적 위압감으로 급격하게 변질된다. 복잡하게 얽힌 인물간의 관계에 담긴 비밀스런 사연을 하나씩 짚어가면서 그 안에 맺힌 의혹을 한 꺼풀씩 벗겨내는 순간의 긴장감과 호기심을 갈무리하던 <궁녀>의 다채로운 표정이 귀기(鬼氣) 서린 타격적인 공포로 급격히 표정을 바꿀 때, 이는 명쾌함이 아닌 의아함으로 와 닿는다. 세심하게 조련된 복잡한 관계의 도면을 살피며 이야기를 따라잡던 재미는 갑자기 출몰한 원혼의 위력에 의해 무너진다. <궁녀>는 인간의 심리적 내면을 입구 삼아 서스펜스의 미로를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출구 찾기의 인내심을 포기하듯 신경질적으로 미로의 외벽을 부수고 탈출해버리는 것만 같다. 물론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함에도 각각의 캐릭터가 개성을 드러낸다는 점은 만족스럽다. 이는 이준익 감독의 조감독 출신 이력을 소유한 김미정 감독의 학습 결과로 추측됨이자 동시에 배우들의 적절한 열연 덕분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궁녀>가 돋보이는 지점은 이야기의 흐름보단 소재의 발굴과 활용에 있다. 사실 궁녀라는 집단은 보필을 목적으로 하는 전문직이란 점에서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에서 하급 계층의 속성을 띠지만 궁궐에 기거하며 왕을 모시기 때문에 적절한 소양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특수한 권위를 보장받는 특이 집단이다. <궁녀>는 베일에 가려진 듯한 소재의 내면적 희소성을 통해 이색적인 신비감을 부여 받는다. –그것이 다뤄진 빈도보단 중점적인 소재 역할의 측면에서 생각해볼 때- 한편, 시대극 안에서 전문 장르를 구축했단 점에서 <궁녀>는 <혈의 누>를 계승한다. 하지만 <혈의 누>가 낯선 시대적 풍경 속에 지방의 원시적 기운을 불어넣으며 차분한 의혹보다는 날뛰는 듯한 야생적 긴장감을 직조했다면 <궁녀>는 시대적 배경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특수한 존재를 전면에 배치하고 그 내부에 잠재되었을 보편적인 심리를 소환하며 첨예한 긴장감의 날을 세운다. 그것은 밀폐된 인간의 불안한 습성을 매개로 한 심리적인 위축감에서 비롯된다. 물론 그 심리적 위축감은 너비의 협소함으로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폐쇄성이 짙은 집단이나 체제의 내부에서도 발견되는 사안이다. 궁녀로 들어온 이상 살아서 궁을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그녀들의 폐쇄적 속성에서도 그런 혐의가 발견된다. 특히나 계급간의 질서가 온전했던 조선 시대의 폐쇄성 안에서 덧씌워진 집단적 밀폐성은 그들의 심리에 뿌리내리고 있었을 심리적 알력을 환기시킨다. 또한 계급의 우열을 지닌 동성 집단이란 점에서 궁녀는 남성성으로 무장한 군대의 속성과 유사하면서도 성적인 대비를 지닌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폐쇄적인 체제 내부에 잠재된 개인의 불안 심리를 집단적 폭력성으로 잠재우고 금기로서 은폐하는 내부적 결속의 방식은 체제의 유지를 위해 개인을 통제하는 군대와 흡사하다. 체제로부터 양산된 폭력성을 통해 체제 내부에 존속하는 이들을 계층적으로 지배하는 주체의 행위가 여성이란 점은 이색적이다. 남자의 전유물처럼 보이는 폭력의 속성이 여성으로부터 자행될 때 성별과 무관하게 집단적인 습성을 통해 폭력이 활용됨을 은연중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궁녀>는 순결을 근본으로 하는 강압적 체제 안에서 사랑할 수 없는 여성들의 가련한 현실을 공포로 치환한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순결을 근본으로 삼는 궁녀에게 금기시된 사랑을 여성적으로 갈망하는 히스테리적 본능은 <궁녀>가 뿜어내는 공포의 원형에 가깝다.
천령의 추리와 수사를 통해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는 <궁녀>는 그녀를 통해 어지러운 사건의 매듭을 단박에 풀어내는 명쾌함 대신 알레고리적 오해 속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사건들의 사소한 욕망, 즉 사랑에 대한 여성의 깊은 갈망을 들춘다. 그 개별적인 사건들이 공통으로 품고 있는 욕망이 하나로 뭉뚱그려지며 자라날 때, 체제는 폭력으로서 그 자연스러운 욕망을 불순하게 억압한다. 그 지점에서 <궁녀>는 특수한 시대성을 배경으로 보편적인 정서를 거머쥔다. 한편으로 스크린을 가득 채운 여성들의 욕망이 지독하게 얽히며 괴물 같은 공포로 뭉뚱그려질 때, 그 욕망의 정점에 선 사랑은 마치 남성이 지향하는 권력과도 같아 보인다. 그것이 욕정이든 순정이든, 여성으로서 허락될 수 없는 본능적인 감정에 대한 허기진 욕망에서 <궁녀>의 비극은 시작되고 매듭지어진다.
<궁녀>는 이야기의 전개 속에서 장르적 기대감이 오해로 변질되지만 소재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간과하지 않고 착실하게 소재의 외형과 내면을 고루 착취한다는 점에서 성과를 드러낸다. 궁녀라는 특수한 집단을 묘사하는 동시에 그 집단을 이루고 있는 여성들의 내면을 첨예하게 세운다. 사랑에 굶주린 여성들의 한이 권력욕처럼 자라나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은 외형적인 관찰보다 내면적인 상상을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특별한 재미를 가미한다. 사랑이란 보편성에 대한 깊은 열망은 가녀림으로 위장된 여성의 정체성을 강인하게 각인시키며 동시에 체제를 위해 희생양이 됐을 순응자들의 감춰진 욕망을 들춘다. 장르적 기대감을 저버리는 이야기의 흐름은 아쉽지만 소재의 특별한 외모 안에 자리한 보편적인 본성을 들추는 사려 깊은 관점이 돋보인다.
2007년 10월 10일 수요일 | 글: 민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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