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게 살자>는 지극히 ‘장진’스러움으로 돌진하는 과감한 소동극이다. 장진이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고 발뺌할지라도 영화 내에서 그의 영향력은 숨길 수 없다. –물론 그는 발뺌하지 않고 있지만- <박수칠 때 떠나라>를 연상시키는 명령어조 제목의 유사성처럼 <바르게 살자>는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는 상황의 흐름 면에서도 전자와 비슷한 기류를 형성하고 있다. 양자의 사건은 범죄를 둘러싼 구성으로부터 출발하고,-우발적인 소행인가, 자발적인 연출인가의 차이를 논외로 한다면-그렇게 진행되는 사건은 매스미디어의 전파를 타고 돌발적인 리얼리티 쇼로 변질된다. 각본에 없었던 우연성은 사건이 지향하던 본질적 목표로부터 상황을 이탈시키고 계산된 예측을 무장해제시킨다. 그런 점에서 <바르게 살자>는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즉흥성을 스크린에 재현하며 미디어 쇼맨쉽을 영화 내부에 액자적으로 배치시켜 영화 밖의 관객을 2차적인 관찰자로 전락시키는 <박수칠 때 떠나라>와의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두 영화의 궁극적인 차이는 결과가 지향하는 태도에 있다. 장난끼의 은유를 궁극적인 함의로 두고 있는 <박수칠 때 떠나라>의 상황극과 달리 <바르게 살자>는 직설적인 풍자를 전제로 한 진지함을 목적지로 두고 있다. 물론 <바르게 살자>가 심각한 표정을 짊어진 관람을 요구하는 영화는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지함이란 영화가 도덕적 타당성에 대한 정치적 태도를 내포하고 있음을 뜻한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이야기 그 자체의 전복만으로 거둘 수 있는 순수한 유희적 목적을 본질로 추구하지만 <바르게 살자>는 맥락이 지니고 있는 목적의 속성이 다르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재기발랄함을 장착한 이야기가 내달리고자 하는 종착역은 바로 제목의 직설, <바르게 살자>는 교훈적 의미와 상통된다.
새로 부임한 경찰서장 이승우(손병호)의 불법 좌회전을 묵과하지 않고 딱지를 뗀 정도만(정재영)의 공정함을 융통성 없음으로 정의하는 상사의 태도는 조직 내에서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불공정한 사회적 질서에 대한 반감을 거머쥐게 한다. 이승우가 융통성 없다는 정도만에게 실감나는 강도가 되길 명령하는 순간부터 발효되는 어떤 예감은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구체적으로 숙성된다. 상사를 후회시킬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소신대로 은행 강도 역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정도만의 유들이 없는 행위는 체계에 완벽하게 복종함으로써 그에 반하게 되는 이율배반적인 역설의 쾌감을 발견하게 한다. 단지 전시적인 효과를 거두려 했던 훈련이 정도만의 유들이 없는 의지로 훈련의 본질을 복원시킬 때 <바르게 살자>라는 제목의 정치성이 강하게 배어 나온다. 또한 그런 역설적인 상황의 완벽한 성립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한 웃음을 자아내며 이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원숙한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의 공이기도 하다.
물론 정치적 공정성을 노골적으로 표방하기 위해 재기발랄함의 영역을 어느 정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르게 살자>의 결말은 정치적 올바름으로 매듭지으려는 영화적 강박의 부담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한편으로 정도만의 단단한 표정처럼 우직하게 와 닿는다. 그 도식적인 결말이 와 닿는 건 이 사회에 깊고 넓게 만연된 정치적 불공정성을 우리가 표면적으로 느끼고 있으며 그를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현실적인 배경이 영화가 연출하는 풍자의 쾌감을 생생하게 이해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정직한 청년이 은행 강도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과정 자체만으로도 <바르게 살자>의 목적은 장르 내외적으로 충분히 기능성을 발휘한다. <바르게 살자>는 그렇게 현실적인 공정함을 위해 재기 발랄한 허구적 재능을 충분히 활용하는 건강하면서도 영리한 작품이다.
2007년 9월 23일 일요일 | 글: 민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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