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 존재가 정말로 있기나 했던 것일까? 개별적인 인간으로서의 내가 있긴 있는 것일까?” 샤를로테 케르너의 소설 <블루프린트>는 인간 복제라는 과학적 성과가 인간의 존엄성을 침범하는 현상을 통해 인간이란 존재 가치의 본질에 물음표를 단다.
관능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한 여성의 주변에 산재된 시대적 감성을 마력 같은 선율에 얹은 <글루미 썬데이>로 관객을 매혹시켰던 롤프 슈벨 감독은 동명원작소설인 <블루프린트>를 통해 몸짓과 대사의 입체적인 활자화를 꾀한다. 하지만 원작이 짊어진 문제의식의 진중함은 스크린이란 필터를 통해 감성적으로 걸러냈다.
복제라는 과학적 성과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비판을 끌어낸 동시대 영화들과 <블루 프린트>는 개체에 대한 접근방식이 다르다. 복제를 통해 탄생한 시리(프란카 포텐테)와 그의 모체인 이리스(프란카 포텐테)는 삭막한 기술력을 등에 업은 탄생 비화와 달리 모녀지간이란 인간적 유대관계를 도모한다. 하지만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시리가 어머니의 유사한 자신의 생김새가 우연적 유전이 아닌 필연적 복제 덕분임을 깨닫게 됨으로서 모녀관계는 수요와 공급의 삭막한 양상으로 몰락한다. 하지만 <블루프린트>는 인위적 결과물을 통해 현대 과학의 윤리적 타락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블루프린트>는 인간의 존재가 지닌 존엄성에 대한 의문이며 동시에 진지한 답변이다.
어머니와 원본 사이에서, 딸과 복사본 사이에서, 그 불명확한 존재적 고민 사이에서 이리스와 시리는 갈등을 빚는다. 하지만 시리의 삶이 이리스의 삶을 복제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이리스와 시리는 복제의 모체와 산물이라는 관계 대신 모녀관계의 인간성에 다가가고 인간이란 개체의식 속에 잠재된 개별적 사유를 증명하게 된다. 인간 각자의 고유한 욕망은 개개의 존엄성과 가치를 획득하게 하는 수단이며, 결국 복제의 산물이든 잉태의 탄생이든 개인의 삶은 결국 각자의 선택을 따른다는 것. 자신의 재능을 탐미하여 대대손손 지속시키고 영유시키려 한 이리스의 욕망은 갈등의 원인으로 도태되지만 결국, 그 굴절된 욕망 끝에 자리하게 된 시리는 존재의 귀속적 목적 대신 자생적 의지를 깨닫고 그를 통해 생의 존엄성을 복원한다. 결국 닭과 달걀의 인과율을 판단할 수 없듯, 인간이라는 존재의 존엄성은 존재 자체만으로 존중받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
사실 <블루프린트>는 존재론적 대명제까지 가지를 칠 필요 없이 단순한 모녀관계의 갈등과 화해 구도로 이해돼도 적절하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하는 이리스의 모습은 청소년들의 성장기 정서로 이해되어도 무방하다. 무엇보다 모녀관계를 함께 연기하는 <롤라런><본 아이덴티티>의 프란카 포텐테의 인상적인 1인2역 연기가 다소 늘어지는 극의 전개로 인한 지루함을 보완한다. 물론 오감을 자극하는 극적인 전개에 익숙한 대다수의 관객에게 <블루 프린트>는 숙면용 영상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미래박람회에 온 듯한 테크놀로지적 상상력으로 화면을 채우는 대신 인간이라는 소박한 사유에 주목하는 미래상은 고풍스러운 신선함으로 여길만한 그릇이다.
2007년 3월 21일 수요일 | 글: 민용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