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희한하다. 구석구석 요모조모 기기묘묘한 정서로 그득하다.
짜기로 유명한 무비스트 20자 평점에서 한국영화로서는 최고치의 점수를 기록 중인 <말아톤> 정윤철 감독의 두 번째 행보로서는 다소 의외다. 장편 데뷔 영화가 기대 이상의 대박을 쳤기에 흥행에 대한 강박이 분명 있었을 텐데 작가주의적 야심을 거두기는커녕 더더욱 굳건히 다지며 거침없이 드러낸 것이다. 과감한 도전인 셈이다. 가족드라마이되 기왕의 그것과는 겹치지 않고, 웃음을 전해주되 익숙한 코미디가 아니다. 카메라 앵글과 움직임, 편집, 영화의 템포 등 모든 것이 비관습적이고 낯설다. 대중영화의 최고 미덕으로 자리한 이야기를 축으로 한 드라마틱함 역시 느슨함을 넘어 부재하다 해도 과한 표현이 아니다. 다양한 인물에게 힘을 실어 캐릭터 위주로 영화를 끌고 나가겠다는 감독의 의도된 결과다. 별스런 구성원들로 이뤄진 가족이 바로 그들이다.
저마다의 사연은 우주적 문제라 할 만큼 깊고 넓지만 이들은 서로에게 뚱하고 무심하다. 말이 가족이지 당최 관심이 없다. 여러 인물을 왕창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얼마 전 돌아가신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영화처럼 이들의 사건사고가 얽히고설키며 종국엔 하나로 묶여 막판에 쾌변 하듯 한방의 강렬함을 선사하는 뭐 그런 것도 없다. 그냥 내버려둔다. 심드렁하게 가족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과 궤를 같이하며 덤덤하게 개별적 존재로 남겨둘 뿐이다. 헤쳐모여!로 수렴되지 않는 내러티브와 생뚱맞은 시각적 묘사가 동일한 법칙 아래 펼쳐진다.
결국 <좋지아니한가>가 말하는 건, 타인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인정할 건 인정하자는 거다. 영화에 나오듯 달과 지구가 조화로운 힘의 균형을 바탕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맛나게 공전 혹은 공존하듯 서로의 관계맺음에 있어 오바하지 말자는 얘기다. 과도한 집착과 닦달은 짜증을 유발하고, 과도한 무관심은 사람 하나 쪼다로 만들만큼 크나큰 화근이 될 수 있다. 애미와 자식의 관계를 묘파했던 <말아톤>의 주제를 <좋지아니한가>는 좀 더 확장시켜 세대간, 남녀간, 계급간의 ‘소통’ 문제를 가족을 빌려 말하고 있는 셈이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바라보는 관계와 가족 그리고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지 아니한가? 라고 자문함과 동시에 관객에는 묻는 것이다.
허나, 소통을 말하는 이 영화가 정작 관객과의 소통에서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는 다소 의문이다. 공감 가는 측면이 없다는 건 아니다. 심씨네 가족이 별스럽게 느껴지는 건 그들을 그려내는 방식 때문이지 캐릭터가 기상천외해서가 아니다. 우리네 가족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가장 사적인 집단인 가족과 그 이면을 들춰내고 반영하고 있기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찰나들이 존재한다.
다만, 이에 더해 그 이상을 무엇을 보여주려 한 정윤철 감독의 야심찬 의도가 관객과 공명하기엔 만만치 않다는 거다. 익숙지 않은 애매 찬란한 화법으로 말을 건네기 때문이다. 예측불허의 진행패턴과 즉각적으로 친절하게 일러주지 않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인물들의 웃기면서도 서글픈 사연이 드러나게끔 에둘러 표현하는 방식. 바로 이러한 장치를 통해 영화는, 소통과 가족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끔 유도하지만 관객이 간파하기엔 무리가 있다. 우리가 이 같은 영화를 자주 접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감독의 의도가 영화적으로 탄탄하게 구축됐다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한 곳으로 모이지 않는 근사한 캐릭터들의 곡절 많은 이야기를 아우르며 뿜어내는 응집된 정서가 부재하다. 내공이 아직까진 그에 이르진 못한 것이다. 허나 언급했듯, 흥행에 대한 부담에 짓눌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먹히는 공식에서 벗어나 영화라는 매체만이 품고 있는 고유한 특성들을 필사적으로 붙들며 담아내려 한 정윤철 감독의 의지와 행보는 결과에 관계없이 충분히 귀감이 될 만하다.
“보는 분들이 이왕이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개입했으면 한다”는 감독의 바람이 말해주듯 비범함을 꾀하는 <좋지아니한가>에 대한 관객의 평가가 어떻게 나올지 자못 궁금하다.
2007년 2월 23일 금요일 | 글: 서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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