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세계에서 가장 유명했던 한 여자가 사망했다. 결혼부터 이혼, 그리고 이혼후의 행보까지 전 생애에 걸쳐 세계 언론의 관심대상이었던 여자, 다이애나 비. 한때 영국 왕실의 일원이었던 그녀의 죽음은 생전의 인기만큼이나 많은 애도의 물결을 불러 일으켰지만, 한편으로 그만한 파고의 파란 역시 불러 왔다. 영화 <더 퀸>은 바로 그 다이애나 비 사후, 영국 왕실이 겪어내야 했던 파란을 그리는 작품이다.
토니 블레어의 총리 당선일 아침, 엘리자베스 여왕과 신임총리의 깐깐한 첫 대면으로 시작한 영화는 이내 고민에 빠진 여왕의 일상으로 파고든다. 이혼 이후 영국 왕실로서는 골칫거리였던 다이애나 비가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평소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영국왕실은 그녀의 죽음에 대해 공식적 언급을 피한 채, 왕실 나름의 일정과 관습을 지켜나간다. 어머니를 잃은 손자들을 돌보기 위해 여왕과 왕실 식구들은 발모럴로 휴가를 떠나지만, 이로 인해 다이애나 비의 죽음을 사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대중의 분노는 더욱 커진다. 왕실의 존재에 대한 회의가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전통을 지키는 것으로 왕실의 위엄을 수호하고자 했던 여왕의 고민은 깊어간다.
다이애나 비의 사후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영화 <더 퀸>은 전통과 절차, 위엄과 존경 따위의 덕목들이 시대적 요구에 의해 변화하는 과정을 그린다. 가치전환의 시대, 실수투성이일지언정 아름다운 영웅을 원했던 대중들은 전통을 고수하려는 왕실의 태도를 존중하지 않는다. 왕실이 지켜내고 싶어하는 위엄은,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표현하고 드러내려는 현대의 대중과는 더 이상 맞지 않았다. 평생을 한 나라의 수장으로서 사적인 욕망보다 왕실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왔던 여왕으로서는 그러한 흐름이 이해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변화였지만, 그녀의 말대로, 변화란 그렇게 때때로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법. 여론에 밀려 결국 모든 것을 수용하는 여왕의 모습에는 그러한 시대적 변화에 대한 안타까운 체념이 묻어 있다.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헬렌 미렌의 여왕연기는 두 말할 것 없는 명불허전이다. 오프닝 화면의 근엄한 표정 하나만으로도 완벽한 여왕다움을 드러내는 그녀의 연기는 그러나 그 어떤 시각적 과장이나 격렬함도 없다. 그럼에도 헬렌 미렌의 연기적 카리스마는 압도적이다. 그녀는 무표정이나 어깨의 떨림, 어조의 변화 등 아주 미세한 몇 가지만으로도 천변만화의 감정을 표현한다. 그녀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몇 주 후 열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주인으로 다른 배우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물론 영화 <더 퀸>에 헬렌 미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블레어를 연기하고 있는 마이클 쉰, 필립 공을 연기하는 제임스 크롬웰 등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 또한 탄탄한 연기로 여왕의 변화과정을 세밀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현존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다는 점에서 <더 퀸>은 더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지만, 감독의 연출은 영리하다. 97년 여름, 영국왕실을 뒤흔들었던 일주일을 좇으면서 그는 당대를 되살리기 위해 어설픈 특수효과를 사용하기 보다는 다양한 뉴스릴 화면을 활용하는 동시에, 절제된 영상표현을 구사하는 전략을 선택한다. 영국 왕실, 왕궁이 지닌 양식미와 전원의 목가적 풍경을 나란히 담은 화면에는 일부러 장식하지 않은 소박한 화려함이 묻어난다.
폭발이나 전투장면 같은 대단한 볼거리나 드라마적 계기가 없는 대신, 각각의 스토리상의 기점들을 표현해 내는 역할은, 뉴스화면과 클로즈업된 당대의 신문 헤드라인,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음악, 그리고 두 말하면 입 아플 배우들의 연기가 멋드러지게 담당하고 있다. <위험한 관계> <그리프터스> 등의 작품을 통해 이미 배우들의 놀라운 앙상블을 끌어낸 바 있는 스티븐 프리어즈는, 현실을 활보하는 실존인물을 다룬 이 영화 <더 퀸>에서 역시 비슷한 수준의 성과를 이끌어냈다. 이 같은 조화로움 속에 영화는 소재의 민감성을 뛰어넘는다. 변화에 뒤쳐졌으나 평생에 걸쳐 국가를 위해 헌신한 여왕의 위엄이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며, 또한 변화와 전통의 사이에서 균형의 지점을 찾아낸 블레어가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매력적인 인물이라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만큼 피터 모건의 각본과 감독 프리어즈의 연출이 정교한(또는 교묘한) 탓이다.
재미있는 것은 언론과 파파라치의 지나친 관심에서 비롯된 한 사람의 죽음, 그리고 역시나 마녀재판을 방불케 하는 언론의 여론몰이 속에 시대적 변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왕실을 묘사하는 이 영화가, 끊임없이 뉴스 화면과 당대의 헤드라인을 화면 가득 채움으로써 이야기의 사실성을 높이고 긴장감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그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기민함이라니. 게다가 실존인물의 위엄이나 명성은 하나도 훼손하지 않으면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모두 전달하는 현명함까지 갖추었다. 이만하면 감탄해도 좋을 영리함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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