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영화의 내용이 상당히 많이 노출돼 있습니다.
시대를 거치며 ‘근대적 아이’의 개념이 확립된 이후,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지켜주겠다는 명목 하에 아름답고 예쁘게 변형되었지만, 본래 동화는 잔혹했다. 계모의 발목을 자르고(백설공주), 마녀를 산 채로 불태워 죽이고(헨젤과 그레텔), 신발을 위해 발을 자르는(신데렐라) 이야기들은 사실 아이들이 보기에 지나치리만큼 가혹한 비전을 제시한다. 험악한 이야기들은 현실의 고통과 아픔을 반영했으며, 이는 아이들에게 잔인한 어른들의 세계를 비춰주는 또 하나의 거울이었다.
길예르모 델 토로의 신작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이하 <판의 미로>)는 그런 의미에서 본원적 의미의 동화다. “오랜 옛날, 거짓과 고통이 없는 낙원 지하왕국에 인간세계를 동경하는 공주가 살고 있었다.”는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요정과 목신, 그리고 괴물과 모험이 존재하는 아름다운 판타지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상 그것은 영화의 주인공인 소녀 오필리아가 현실을 잊기 위해 꾸는 꿈, 환상에 불과하다. 잔인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소녀의 꿈이란 짓밟히고 좌절되기 십상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어린 소녀에게 파시즘이 세계를 뒤덮기 시작한 1944년의 스페인 산골마을은 가혹한 환경이었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재혼을 선택한 어머니를 따라 산골마을까지 왔지만, 무리한 여행으로 어머니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져 함께 잘 수도 없다. 어머니의 건강보다 태중의 2세를 중시하는 계부는 반정부군을 소탕하겠다며 군대를 이끌고 산골마을로 자원해온 인물.
극단적 파시스트인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일삼으며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다. 그러니 내전이 끝났어도 여전히 전쟁 중인 산골마을에서, 급작스런 환경변화와 격리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소녀 오필리아가 할 수 있는 일은 공상뿐이다. 소녀는 꿈을 꾼다. 산 길에서 만난 벌레가 요정이고 집 근처에 있는 버려진 미로의 터가 자신이 본래 존재했던 지하세계로 가는 입구라고. 목신 판의 도움으로 세 가지 임무를 수행하면 자신은 이 잔인한 세계를 벗어나 거짓과 고통이 없는 낙원으로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탈현실을 꿈꾸는 소녀에겐 꿈조차도 쉽지 않다. 그녀에게 주어진 세 개의 임무는 현실과 얽혀 고난이 되며, 모든 동화가 그러했듯이, 아니 현실에 발을 딛고 있기에 그 보다 더욱, 운명은 잔혹할 뿐이다.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의 잔인성을 드러내기에 동화보다 적절한 구성은 없었을 터, 감독 길예르모 델 토로는 음험하고 음울한 비주얼로 이 아름다운 잔혹동화를 완성했다. 끈적한 진흙투성이의 괴물 두꺼비, 손바닥에 눈이 달린 식인괴물은 물론이려니와, 기괴한 모양에 고자질쟁이인 요정, 신경질적이고 권위적이기까지 한 목신 판은 우리편인지 아닌지조차 헷갈리는 독특한 외양과 성격의 캐릭터들. 소녀 오필리아의 환상 속에 등장하는 이 캐릭터들은 그 어떤 동화에서 보다 음침하지만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다. 문을 만들어주는 분필, 인간을 닮은 맨드레이크 뿌리, 황금 열쇠 등의 소도구들은 소녀의 판타지에 활력을 불어넣고, 쉴 새 없이 귓가에 들리는 벌레 소리, 나무복도의 삐걱대는 소리, 빗소리, 총성, 그리고 음울하기 그지없는 자장가 선율은 비극적 판타지에 묵직함을 더한다.
적절한 비율로 조율된 환상과 현실의 이야기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대조적인 각각의 세계는 현실의 암울함을 더욱 강조하는 효과를 낳는다. 그리하여 결말부, 관객은 깨닫게 된다. 오프닝 화면에서 보았던 피 흘리며 웃는 소녀의 얼굴이 실상 얼마나 슬픈 것이었나를. 거꾸로 흘렀던 시간의 흐름이 바로잡히고 애잔한 자장가 속에 소녀의 눈동자가 멈추고 나면, 대조적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지하세계의 비주얼과 맞물려 슬픔은 배가된다. 델 토로의 거울은 아름답고, 그래서 더욱 슬프다.
그러나 소녀의 죽음만이 슬픈 것은 아니다. 영화는 1944년의 스페인 산골마을을 통해 고통과 거짓만이 난무하는 어른들의 세계 자체가 비극이라고 이야기한다. 꿈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맨드레이크 뿌리는 벽난로 속에 던져져야 하며, 문을 만들어주는 분필은 쓰레기 조각일 뿐이다. 삶을 위한 투쟁만이 존재하는 것은 대도시나 산골마을이나 마찬가지이며, 이데올로기가 개입되었을 때 그 투쟁은 더욱 살벌해진다. 확인사살을 위해 시체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잔혹함은 정부군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환상의 틈입을 용납치 않는 인간의 시대가 만들어낸 비극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러한 비극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아이의 눈을 빌었을 때뿐이다.
어른들에 의해 각색된 동화와 어른들의 관점만이 횡행하는 세계 속에 이제 남은 것은 없다. 아버지의 망령에 사로잡힌 파시스트(대위)도, 현실과 타협한 순응자(어머니)도, 결국 돌려받은 것은 죽음이다. 가엾은 희생자(오필리아)는 꿈 속에서나마 행복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저항자(메르세데스)는 결국 살아남아 파시즘이 가득한 세계와 마주했을 것이다. 좌절과 비극이 넘치는 세계에서 남은 것은 꿈을 꾸듯 영화를 보는 일뿐이다. 희생을 통해 만나는 환상의 세계는 아름답지 않냐고? 영겁을 믿지 않는 자에게 죽음 이후가 무슨 소용인가. 정말, 제대로 잔혹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