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스콜세지는 개인의 역사에서 폭력의 일대기를 끄집어 내, 미국의 역사를 물었다. <비열한 거리> <성난 황소> <택시 드라이버> <갱스 오브 뉴욕> 각각의 영화는 그 질문에 나름 하나의 답을 제시한다. <무간도> 리메이크 작 <디파티드>는 역시나 원작의 무드 포스를 리얼리티로 전환하며 개인의 역사를 서두로 풀고 미국의 역사를 그 후에 묻는다. 정확히 말해, 내일모레 70을 바라보는 거장 마틴 스콜세지는 묻기보다 이젠 미국을 대놓고 조롱하기에 이른다.
원작이 너무 유명한지라 <디파티드>의 스토리는 뻔할 뻔자고, 간지 대신 리얼리티를 살려낸 영화의 형식 또한 마틴 스콜세지라는 이름 앞에서는 물음표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미국을 조롱할 방법이 왜 굳이 리메이크인가? 를 묻는 게 그의 신작 <디파티드>를 가장 빠르게 이해하는 지름길로 안내할 것이다. 미국이란 국가를 폭력의 역사로 정의내린 마틴 스콜세지에게 미국은 미시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생명체다. 생명의 기원은 있으나 뿌리가 명확하지 않은(혹은 아버지를 부정하면서) 미국은 끊임없이 외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받길 원해왔고 지금도 그렇다.
약을 대로 약은 백발성성한 노인은 한 편의 홍콩 느와르영화를 보고 악의적인 장난끼를 발동했다. 한껏 폼 잡은 유덕화와 양조위에게서 허우대만 말짱한 양키 수컷들의 생활을 엿보았고 그들의 신분 찾기 혹은, 신분 숨기기 게임에는 미국의 양면성을 대입해 봤다. 맞춤옷을 해 입은 것처럼 딱 맞는 이야기 아귀에 老감독은 검은 뿔테 안경이 흔들릴 정도로 손뼉을 치며 좋아라 했을 거다. 미국을 이야기하기 위해 동양의 느와르 영화를 차용한다, 뿌리가 명확하지 않은 미국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방법이 어디 있을까? 설사 완성도가 높지 않더라도 소기의 목적은 리메이크 그 자체로 달성되니, 손 안대고 코푼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제격일 듯.
대신, 걸작과 범작의 수준 차이가 투명지 한 장 밖에 안 나는 감독의 혜안은 유머와 조롱을 명확하게 구분 짓고 있다. 품질 좋은 원작의 고품격 무게감을 경박하게 깎아내리지 않는 감독의 평정심과 이야기의 핵심을 명확히 짚어내는 감독의 예리한 시선은, <디파티드>를 언제든 관객의 편의대로 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 풍부한 소스의 원천이다. 더불어 원작영화 <무간도>를 보는 이 맘대로 따로 또 같이 배치할 수 있게 해준 감독의 센스는 뉴요커 우디 알렌의 자기 희화화 코미디처럼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글_ 2006년 11월 21일 화요일 | 최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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