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 바둑왕」로 국내에서도 열혈 팬층을 형성한 오바타 다케시 원작의 「데스노트」가 동명의 영화로 제작됐다. 일본영화 역사상 1, 2편 동시제작. 순차 개봉은 이미 일본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연일 화제다. 설사 원작에 못 미치는 영화가 탄생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심리의 허를 찌르는 탄탄한 구성과 상상초월의 이야기를 전개를 보여준 원작의 아우라 때문에 그리 큰 실망은 주지 않을 것이다.
일단 영화 <데스노트>(1편)는 원작자의 의도를 충분히 잘 살렸다는 점에서 합격점이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키라, 야가미 라이토(후지와라 타츠야)와 키라를 정의라는 이름하에 악으로 정의 내린 L(마츠야마 켄이치)의 대결은 선과 악의 대립으로 읽히기보다는 인간본성의 원형에 가까운 대결로 드러난다. 원작에서 류자키(L의 가명)가 죽은 이후로 이야기의 전개가 일본만화의 특유의 황당무계한 그 뻔함으로 흘러간다는 비판도 있지만 원작이 여전히 인기 있는 이유는 사신의 노트에 이름만 적으면 타인의 생명을 뺏을 수 있다는 설정에서 오는 마력이 끊임없이 독자를 자극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데스노트’는 무기력하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욕망을 구현한다. 악은 있지만 그것을 심판 내릴 수 없는 현 사회구조로 인해 영화 초반 라이토가 왜 데스노트를 이용,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지,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에게도, 충분히 설득력 있게 전달된다. 노트에 이름만 적으면 이름이 적힌 대상은 40초 이내에 심장마비로 죽는다. 최소한의 행동으로 최대치의 결과를 얻는 이 살인게임은 애초 선과 악으로 구분 짓기에는 무리였다. 이 최소의 행동으로 범법자들을 처단하는 키라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도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권력을 소유한다. 이런 키라의 모습을 통해 무기력한 동시대인(관객, 독자)은 은폐와 노출 사이에서 야릇한 대리만족을 얻는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악 혹은 정의를 실현할 수 있게 해주는 데스노트는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개인주의에서 그 실존적 가치를 인정받는다.
라이토와 류자키의 대결은 국가적 대결도 아니고 이데올로기의 대립도 아니다. 단지, 라이토는 데스노트를 통해 사회를 정화시킬 수 있는 절대권력 신이 되고자 하는 것뿐이고 류자키는 철저한 운둔생활 속에서 지적만적을 추구하고자 키라를 밝혀내고자 하는 거다. 이 두 주인공은 상대에게 서로를 감춘다. 그래도 외부에서는 끊임없이 데스노트에 의한 음모와 사건이 발생하면서 보이지 않아도 이 둘은 존재성을 확인 받는다.
자신만의 철옹성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사회에서 확인받고픈 이 배반의 감정이, 데스노트가 인간 세상에 떨어진 근본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원작과 다소 차이를 보이는 구성과 설정은 원작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해석이 바탕이 됐기에 또 다른 긴장감을 선사한다.
알면서도 궁금한 2편이 하루빨리 개봉하길 기다리면서 소심하게 데스노트에 누군가(ㅋㅋ)의 이름을 적어본다.
글_ 2006년 10월 31일 화요일 | 최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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