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의 창가 너머로 보이는 고속도로의 외관은 겨울 햇살에 부서져 앙상한 기운을 금방이라도 감염시킬 듯 타오른다.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다. 메마른 온기가 가득한 버스 안에서 겨울풍경을 바라보며 그세 공기의 습기를 흡착하는 건조한 추위를 잊으니 말이다. 그저 ‘밖은 무척 춥구나’ 혼자 되뇌며 순간의 안락만을 즐길 뿐이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4~1989), 러시아 출신의 20세기 천재 피아니스트. 61년 만에 고향 땅 러시아를 방문해 연 “61년만의 귀향 연주회” 지금까지 가장 아름다운 피아노 콘서트로 기록되고 있다. 지금 우린 한국의 호로비츠를 만나러 대전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겨울풍경은 그 심심한 짧은 여행길을 시간의 지루함으로 말상대 해주는 길동무다.
서울이 세상의 전부인 줄 살고 사는 본 기자에게 대전은 겨울공기처럼 낯설게 피부에 닿았다. 빈틈없이 채워진 서울전경에 익숙해서 그런지, 고개만 15도 기울여도 하늘이 펼쳐지는 대전은 그저 타인의 도시일 뿐 별 감흥을 주지 않는다. 갑자기 절감하는 추위 때문에 혹은 짧은 여행의 여독을 풀기위해 서둘러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서성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육중한 철문을 들고 호로비츠가 있는 그 곳을 노크했다.
어둡지만 온기가 전해지는 <호로비츠를 위하여> 촬영장.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이제는 건반조차 눌러지지 않는 낡은 피아노 한 대. 그 너머로 사람들이 모드 동작을 멈추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아노 선율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현장에서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취재기자들을 곧잘 기죽게 했던 스텝들이 이렇게 동작을 멈추고 있는 모습을 처음 봤기에 들려오는 정작 소리에는 순간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어두운 촬영장에서 유일하게 밝은 조명 빛을 받고 있는 피아노 레슨학원 세트장 안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선율 때문임을 이내 알아차렸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그 공간은 밝은 조명 빛 아래에서 따뜻한 기운을 잔뜩 실은 '바흐의 인벤션 No2' 선율에 따라 온기를 가득 품고 있었다. 모두가 동작을 멈추고 있는 가운데 숨소리 죽여가며 세트장 안으로 들어가니, 단아한 차림으로 피아노 선생처럼 보이는 한 여성이 한 소년의 피아노 연주를 지도하고 있는 보였다.
소년의 작은 손가락은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따라 순간순간 부드러움과 강함 그리고 섬세함을 넘나들며 방 안 가득 들어오는 조명 빛을 자연의 태양빛으로 바꿔버린다.
나의 작은 <호로비츠를 위하여>에서 만난 주인공 ‘엄정화’와 그녀의 호로비츠 피아노 신동 ‘신의재’ 군은 멀리서 찾아온 우리를 그렇게 음악으로 환영하고 있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옆에서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던 꼬마가 그 변화를 이끈 주인공임을 시간이 흐르자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부모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불안 증세를 보이는 소년은 세상으로 향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다. 그러나 소년은 이상하게도 피아노 선율에는 자기도 모르게 반응하는 소위 천재끼를 타고났기에 주체할 수 없는 마력처럼 피아노에 강한 집착을 보인다. 소년의 이름은 ‘윤경민’
경민을 연기하는 ‘신의재’군은 실제 피아노콩쿨대회에 나가 여러 차례 대상을 수상한바 있는 진짜 천재 피아니스트다.
<호로비츠를 위하여>는 엄정화의 첫 번째 휴먼드라마다. 피아노 신동의 좌절과 성공을 그린 드라마를 지향하긴 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따스한 정(精)을 피아노 건반 위에 그려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이 투영된 제작규모 26억짜리 작품이다.
음악에 홀려 영화에 대한 정보를 이리저리 써내려가고 있을 때, 일명 찐빵모자를 쓴 인심 좋은 아저씨가 생기발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멀리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흠.......... 누굴까? 감독은 아닌 것 같고, 저 이상한 모자가 웃기다는 생각을 하면서 겉치레적인 답례인사로 고개만 까딱거렸다.
그는 촬영장의 이방인인 기자들을 위해 감독 의자를 선뜻 내줄 만큼 넉넉한 인심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섬세하게 현장을 지도하고 매 씬마다 엄정화, 신의재군과 함께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에선 감독으로서의 세심함과 날카로움을 보여줬다.
‘권형진’ 감독은 사실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준비된 신인감독이었다고 한다. 1989년 <물의 나라>(감독 유영진) 조연출을 시작으로 영화와의 인연을 맺은 뒤로 엄정화의 데뷔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감독 유하)의 조감독까지 거쳤다. 그 뒤로 200여편에 달하는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유명인이 됐고 2001년에는 이정재, 유지태 주연의 인터넷 영화 <MOB2025>를 감독했다.
그의 과거 이력만 보더라도 그가 음악영화 감독으로 데뷔작을 선택한 것도 이해되면서 엄정화를 주연으로 캐스팅한 이유도 살짝 엿볼 수 있다.
2시간에 걸쳐 진행된 이번 촬영은 지수와 경민이 피아노를 매개로 소통하는 장면이다. 손으로 반찬을 집어 먹는 경민을 나무라는 지수에게 서운했는지 경민은 도망치듯 피아노 앞에 앉아 김칫국 묻은 손으로 피아노를 친다. 경민의 연주에 놀라는 지수..............
이 둘의 그 다음 이야기는 영화 개봉 때 확인하시길~~~
촬영장 공개 후, 간단히 열린 기자간담회 장에는 엄정화를 짝사랑하는 구멍가게 피자집 주인 ‘박용우’도 이날 촬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참석했다. 감독과 주연배우들이 참석은 당연한데 아까 잠깐 스쳐 인사한 빵모자 아저씨도, 박용우 옆에 자리를 잡고 간담회에 임할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게 아닌가. 차례차례 감독과 주연배우 이름이 호명되고 드디어 빵모자 아저씨가 누구인지 밝혀졌다.
기자들의 저돌적 질문 속에서도 의외의 답변을 날려 현장을 웃음바다로 만든 ‘신의재’군은 “연기가 쉽다”는 당돌한 말을 남겨 순간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기도 했다.
지난해 <혈의누>에서 보여준 강렬한 연기로 요즘 상종가를 치고 있는 ‘박용우’는 “여배우와 내가 별로 안 친한 성격인데 엄정화씨는 이번 영화를 통해 유일하게 친한 여배우가 됐다. 엄정화씨가 먼저 다가와 줘 너무 감사하다”라는 말을 남겨 기자들의 의혹 아닌 의심의 눈길을 받았지만 이어진 ‘엄정화’의 답변으로 모든 게 곧 해명됐다.
“제 나이에 내가 먼저 친한 척 안하면 나 챙겨주는 사람 없다”는 그녀의 대답은 행사장을 한층 더 향기롭게 해줬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을 반주삼아 삶의 향기와 소통을 이야기 할 나의 작은 <호로비츠를 위하여>는 1월 말에 촬영을 마무리하고 봄기운 가득한 4월에 관객을 찾을 예정이다.
취재: 최경희 기자
사진: 권영탕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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