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한낮은 무덥지만 이 여름도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이미 낮의 길이가 밤보다 짧아지기 시작했고, 옷가게에는 일찌감치 신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어 다가오는 계절을 예감케 합니다.
계절의 변화는 영화계에서도 감지됩니다. 공포영화나 블록버스터같은 요란한 영화보다 멜로 영화의 크랭크 업이나 개봉 소식이 더 자주 들립니다. 미셸 곤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도 그런 영화 중 하나입니다. 평단과 관객이 만장일치의 호평을 보냈던 이 영화가 진작에 수입되고도 (미국 개봉일을 기준으로) 1년 반이나 지나 올 가을이 돼서야 개봉할 수 있게 된 것도 ‘멜로 영화는 가을에 잘 통한다’는, 일종의 계절특수를 노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과연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여름의 불볕같은 열정적이고 화끈한 사랑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잊혀져가는’ 사랑과 그 안타까움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찬바람 불어 쓸쓸함이 가슴 한켠을 쓸고 지나가는, 그런 계절에 더 잘 어울릴 듯한,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기억삭제’라는 색다른 소재를 기괴할 만큼 환상적으로 연출한 <이터널 선샤인>은 그 낯선 모양새와는 달리 ‘사랑’에 대해 가장 낭만적인 정의를 내리는 영화입니다. ‘사랑은 운명이다. 거부할 수도 조작할 수도 없으며 설령 지금과 다른 상황에서 만났다 하더라도 그/그녀와 다시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터널 선샤인>이 들려주는 환상적이고도 로맨틱한 사랑의 해석에 미리 귀기울여보지 않으시렵니까?
▶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렇듯 <이터널 선샤인>은 '기억삭제‘라는 가상의 기술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억삭제술‘이란 의뢰인이 원하는 특정 기억만을 제거하는 비외과적인 치료라고 합니다. 기억과 자아 간의 관계는 SF영화들이 즐겨 다룬 소재였고, 때로는 <토탈 리콜>처럼 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심도있는 철학적 논의의 근거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소위 ‘기억이론’이라는 것으로, 개인의 정체성은 그가 가지고 있는 기억과 그 밖의 여러 심리 상태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지요.
<이터널 선샤인>도 ‘기억’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토탈리콜>같은 철학적 깊이를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토탈리콜>에서 ‘하우저’는 단순히 코하겐의 요원으로서의 과거의 기억을 ‘삭제’한 데 그치지 않고 ‘퀘이드’라는 광산노동자의 기억을 새로이 ‘주입’함으로서 다른 인간의 정체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반면 <이터널 선샤인>은 단순히 기억의 일부를 삭제하는 데에 그쳐, 개인의 정체성을 변함없이 유지됩니다. 기억 삭제 이후에도 여전히 이전과 다를 바 없는 ‘그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단순히 일부 기억을 지울 뿐이라는 <이터널 선샤인>의 설정은 멜로 영화로서의 상품성에 이중의 효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우선 영화가 쉬워졌지요. 기억과 개인의 정체성의 관계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물론 흥미로울 수 있겠지만 영화를 같이 본 연인이 토론하기에는 지나치게 딱딱한 주제일 것입니다. 또한 ‘기억 삭제’ 이후에도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설정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사랑의 유형들에 낭만적인 속성을 부여하는데 필수적인 역할을 합니다. 가령 기억이 대체되어 다른 사람이 정체성을 갖게 된 사람이 이전의 애인과 다시 한 번 사랑에 빠진다면 그건 또 다른 사랑의 우연한 시작일 뿐일 것입니다.
하지만 컴퓨터의 Reset 단추를 누르듯, 이전 상황을 깨끗이 잊어버린 상태에서도 그/그녀가 특정한 그녀/그와 다시 사랑에 빠져버린다면 그것은 사랑의 운명성/영속성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도 너만을 사랑할꺼야” 같은, 그닥 신용이 가지는 않지만 더없이 감미로운 닭살멘트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거지요. 동양적 전통에서라면 ‘환생’의 형태로 제시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정해진 상대와 다시 사랑에 빠진다는 이 영화의 설정은 사랑에 대한 ‘예정론’적 관점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든지 간에 미래에 일어날 일(특정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일)은 이미 정해져 있고, 사랑의 순수함/절대성에 인위적 조작을 가하는 것은 범죄와 다를 바 없는 행위라는 것이지요. <이터널 선샤인>에서 패트릭(일라이저 우드 분)은 조엘의 언어와 선물로 클레멘타인의 사랑을 얻으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마는 파렴치한으로 묘사됩니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과정은 동일한 조건하에서 동일한 결과가 나오는 그런 결정론적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선물을 주었느냐가 아니라 ‘누가’ 주었느냐? 만이 사랑을 시작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진정한 사랑은 아무하고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대와만 가능하다’는 믿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고, 그 다양한 해석의 스펙트럼에 있어서 가장 낭만적인 방식은 <이터널 선샤인>이 그러하듯이 사랑을 일종의 ‘운명’으로 보는 것이겠지요. 물론 ‘운명’이라는 애매한 개념 대신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도 많습니다. 가령 생물학자들은 근친교배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유전적 불리함을 회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자신과 조금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런 주장을 옮기고 있는 저 자신부터가 그 이론들의 설득력을 인정하면서도 ‘나에게는 저런 생물학적이거나 사회학적 조건이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어떤 신비에 의해 운명 지어진, 그런 사랑의 대상이 존재할 거야’라고 믿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성격도, 지적인 배경도, 그 무엇하나 어울리는 것이 없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헤어짐과 재결합에 슬퍼하고 기뻐하는 이유도 이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사회적 배경도 다르고 성격도 전혀 다른 남녀가, 심지어 과거의 기억을 깡그리 다 잊은 상태에서도 서로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설정을 통해, 그것이 일종의 신화라 하더라도 “사랑=운명”의 이라는 로맨틱한 애정관을 확인받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욕구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영화이지만 <이터널 선샤인>이 그렇다고 초지일관 낭만적이고 달콤한 분위기로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조엘의 ‘꿈’ 장면은 때로 무섭다는 느낌이 들만큼 기괴하고 환상적입니다. ‘삭제’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가는 꿈속의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가령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진다든가 방금 지나왔던 공간을 다시 지나가게 된다든가, 이성적인 해석일 불가능한 부조리한 상황들에 직면합니다. 필요 이상 기괴한 그러한 장면들은 감독과 각본가의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반영된 것이겠지요.
▶ 미셸 곤드리 + 찰리 카프먼 + 짐 캐리 = ?
<존 말코비치 되기>, <어댑테이션> 등을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은 찰리 카프먼이 시나리오를 쓰고, 비욕, 케미컬 브라더스, 롤링 스톤즈 등의 뮤직비디오와 나이키, 코카콜라 등의 CF를 통해 천재적인 영상감각을 인정받은 미셸 곤드리가 감독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이미 <휴먼 네이처>를 함께 작업한 경험이 있지만, 찰리 카프먼의 변함없이 완벽한 시나리오를 감독이 미숙하게 연출했다는 일관된 악평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 번의 실수로 기대를 접기엔 미셸 곤드리가 CF와 뮤직비디오 신에서 보인 재능이 너무 인상적이었죠. 그리고 <이터널 선샤인>를 통해 그는 자신의 재능이 과대평가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증명해 냈습니다.
사실 ‘찰리 카프먼 + 미셸 곤드리’는 멜로 영화에는 적당한 조합은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유명 배우의 뇌 속으로 들어가 그 뇌 속에서 삶을 지속한다는, 전대미문의 황당한 상상력을 선보인 <존 말코비치 되기>의 찰리 카프먼은 ‘천재’라는 호칭이 전혀 과장이 아닌 시나리오 작가이지만, ‘사랑’의 의미를 천착하며 그 애틋함을 소화해 내기엔 지나치게 심각하고 냉소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존 말코비치 되기>가 촉발한 ‘정체성’에 관한 철학적 논의들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매트릭스>만큼 인구에 회자되지는 않았지만 <매트릭스> 못지 않게 난해했다는 점도 멜로 영화의 각본가에 어울리는 이력은 아니었지요.
촉망받던 CF/MV 감독 미셸 곤드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차 창을 통해 바라본 풍경만 보여주는 케미컬 브라더스의 "Star Guitar", 동네를 한 바퀴 돌 때마다 복제되어 급기야 5명의 카일리 미노그가 등장하는 정교한 CG를 선보인 카일리 미노그의 "Come Into My World", 곰이 사냥꾼을 습격하고 나방이 식탁 위의 음식으로 등장하며 하늘에는 우주선이 날아다니는 기괴한 공간을 연출한 비욕의 "Human Behaviour" 뮤직비디오에서 보듯이, 미셸 곤드리가 연출한 작품들은 뮤지션의 색깔과 음악의 분위기에 맞추어 다양한 기술적/형식적 실험을 시도했지만, 그 결과물은 언제나 시간과 공간이 뒤엉킨 혼돈의 세계였고, 감미롭기보다 기괴했습니다.
이런 미셸 곤드리에겐 멜로 영화가 아니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실사 버전쯤이 어울릴 법했지요.
각본가/감독으로서의 역량과는 별개로 미셸 곤드리와 찰리 카프먼라는 이름은 <이터널 선샤인>의 ‘멜로 영화’로서의 상품성에 오히려 부정적인 요인인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난해하고 기괴하며 냉소적일지도 모른다는 우려와는 달리 <이터널 선샤인>은 ‘비교적’ 평이하고 적당히 환상적이며, 무엇보다 사랑에 대해 무척 낭만적인 정의를 내리는 감미로운 영화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천부적인 이미지스트로서의 면모와 인간의 의식과 자아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며 감독과 각본가의 자의식 역시 자랑스런 인장처럼 영화 곳곳에 선명히 새기고 있습니다.
<이터널 선샤인>이 비평적 찬사와 관객의 한결같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건, 이렇듯 감독과 각본가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멜로 영화라는 자기본분에 충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 기억 삭제? 가능할까?
‘기억 삭제(Targeted memory erasure)’라는 특이한 소재를 영화화한 만큼, 실제 그런 기술이 가능할까라는 점에 관심이 가는 것도 당연합니다. 영화제작사는 기억삭제술을 시행한다고 설정되어 있는 ‘라 쿠나’ 사의 웹사이트( http://www.lacunainc.com/ )를 통해 그 과학적 근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억삭제술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진행됩니다. 우선 뇌 스캔 장치를 통해 과거의 연인과 관계된 물건이나 일기장 등에 대해 반응이 일어나는 뇌 부위를 찾아냅니다. 그 데이터를 토대로 삭제할 기억들의 위치를 나타내는 ‘지도’를 제작하고(mapping), 의뢰인이 안정제를 먹고 잠에 빠져 있는 동안 특별한 장치를 통해 해당부위의 기억을 삭제합니다.
라 쿠나의 주장에 따르면 기억 삭제는 일종의 뇌손상에 해당하지만 그 손상도는 과음을 한 정도에 그친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손상으로 원하지 않은 기억을 제거할 수 있다면 한 번 시도해 봄직도한데,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기술 수준으로는 불가능함은 물론이고 가까운 시일내에도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 기억삭제술이 가능하기 위해 해결해야할 기술적인 문제점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각각의 기억들은 그 종류에 따라 해마와 그 주변, 전뇌의 기저부, 시상 전내측부 등 뇌의 여러 곳에 따로 저정된다는 점인데, 어떤 특정 기억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활성화되는 부위들간의 연관성을 체크하여 정확한 맵핑이 가능할까 하는 점부터가 의심스럽습니다. 설령 맵핑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해마와 같이 뇌 안쪽 깊은 곳에 위치한 부위에 대한 기억 제거술이 라 쿠나의 주장대로 외과적 수술없이 가능할 것 같지도 않구요.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아직 기술적 난점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뇌과학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최근의 기억들이 장기기억(long-term memory)으로 바뀔 때, 뉴런의 시냅스 사이에 새로운 링크가 형성되기 위해선 단백질 합성을 비롯한 여러 과정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라 쿠나는 특정 기억이 일단 회상된 후 장기 기억으로 변형될 때 필수적인 단백질 합성 과정을 방해함으로써 그 기억이 장기기억으로 변형되지 못하게 하고, 아예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지요.
하지만 정확한 맵핑을 통해 특정 기억이 장기기억화 되는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다 하더라도, 특정 부위의 단백질 합성을 방해한다는 분자 수준의 그런 극미세한 조절이 가능할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또한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뉴런간의 수조개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는 뇌의 구조상, 한 부위의 손상이 다른 부위에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며, 그런 손상이 단순히 숙취 정도에 불과한 손상만 일으킬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러저러한 조건을 따지지 않고 어쩔 수 없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사랑,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신비로운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강렬한 사랑. <이터널 선샤인>은 바로 그런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셸 곤드리와 찰리 카프먼의 이 색다른 멜로 영화는 낯설고 환상적인 영화 공간으로의 여행을 원하는 분이나 그/그녀와 함께 볼 애틋한 멜로 영화를 원하는 분, 모두를 만족시킬 뛰어난 영화입니다.
P.S. 짐 캐리의 놀라운 변신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건 부당한 처사일 것입니다. 단 한 컷의 코믹 연기도 없이 영화 내내 공허와 상실감에 짖눌린 궹한 눈동자로 삶의 우울과 고독감을 드러내는 짐 캐리는 마치 처음 보는 배우인 듯한 인상입니다. 케이트 윈슬렛의 안정된 연기야 말할 것도 없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