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애초에 그런 것일까. 미친 듯 살을 탐하고, 가슴속에 잔해만 남기는 텅빈 꽃게 무덤처럼...’ 어느 소설가의 이런 표현이, ‘텅’하고 뒤통수를 치는 걸 보니 기자의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녹색의자>의 두 연인을 떠올려도, 그 쓸쓸한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그들 또한 미칠 듯이 서로의 몸을 갈구하고 발톱 끝까지 ‘사랑’을 느낀다. 몸을 느끼고, 서로의 향기를 느끼고, 마음을 느끼다가 그들도 ‘헤어진다’(훗날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만!).
32살 이혼녀 ‘문희(서정)’와 19살 법적 미성년 ‘현(심지호)’의 사랑을 그린, 이 영화는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다. 2000년 겨울, 30대 유부녀와 10대 고교생이 ‘역(逆)원조교제’를 이유로 구속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 사건은 (개인적으론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어쨌거나 충분히 예상은 가능하게도) 사회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실제 사건은 사람들의 무수한 돌팔매, 아니 욕팔매를 받으며 법정판결까지 진행됐겠지만, 다른 무수한 신문 속 사건들이 그렇듯, 그 뒤의 이야기들은 알 수 없게 돼 버렸다. 그런데 박철수 감독이 그들의 ‘다음’ 이야기를 상상했다. 2년의 형을 마치고 나온 ‘문희’와 그런 그녀를 변심하지 않고 찾아온 ‘현’의 이야기로.
사족이지만, 모두가 슥슥 훑어보는 신문에서 소머즈같이 밝은 눈을 빛내며, 이 사건을 창작의 소재로 캐치해 낸건, 박철수 감독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이 사건을 그냥 본듯만듯 지나쳤지만, 뜻밖에도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저 멀리 미국에서 메일을 보내왔다는 것. “한국 사이트를 검색하다가 봤는데, 아니, 왜 이 재미있는 얘기를 영화로 만들지 않는 거죠?”
그래서 탄생한 영화가 <녹색의자>다. 실제 사건의 이미지들을 스피드있게 담아낸 이 영화의 도입부만을 봤을땐, 드러내고자 하는 함의가 비교적 노골적이고 강하다. 예를 들어‘문희’를 취조하면서, 또 ‘현’의 진술을 받으면서 수사관이 드러내는 가부장적인 편견이랄지 아니면 갓 출소한 ‘문희’를 게떼같이 습격해 상처입은 그녀를 아예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옐로우 저널리즘같이.
‘세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헤어졌던‘문희’와 ‘현’의 그 다음 이야기, 만나서 섹스하고, ‘진’의 집으로 가서 함께 살아가고 하는 등의 일련의 스토리에는 고급한 멜로의 향기가 입혀진다. 의도와는 빗나가기 일쑤인 공허한 ‘말’대신, 그들은 ‘몸’으로 희노애락을 얘기한다. 특히 싸구려 여관방에서 숱하게 벌어지는 섹스 속에도, 그들에겐 인간의 벌건 육체가 유발할 수 있는 구역나는 통속성이 돼지피처럼 쏘옥 제거돼 있다. 대신에 박철수 감독은 ‘세상아, 멋대로 떠들어라. 그들은 이렇게 정말 사랑하고 있다!’라는 무언의 외침을 보여주듯, 세피아톤의 우울하면서도 감미로운 느낌 속에 그들의 섹스를 살포시 얹어놓고 있다.
그 의도에 부합되는 매력적인 육체의 서정과 심지호는 ‘역원조교제’같은 징글징글한 폄하의 어휘로 뒤덮여지는 연인이 아니라, 우리들의 보통 사랑과 다르지 않은, 속깊은 연인들이다.
하지만 <녹색의자>가 진정 재밌어지는 부분은 그 마지막 부분. 아름다운 몸짓을 취하려고 하는 이 영화의‘멜로’장면들이 생각만큼 마음을 움직거리지 않는, 어딘가 익숙하고, 어딘가 진부한 느낌들로 휘감아돈다면, ‘현’의 스무살 파티는 갑자기 이 영화를 다른 느낌으로 변주하고, 격상시킨다.
주인공들(‘문희’, ‘현’, ‘진’)의 상상, 혹은 감독의 상상이라 해도 좋은 이 파티 장면은 영화가 아닌‘연극적’인 질감들로 구성돼 있고, 여기엔‘문희’와 ‘현’의 사랑을 바라보는 주변인물들의 꾸밈없는 속내들이 배치된다.
비단 파티 장면뿐 아니라 <녹색의자>에는 일반적인 드라마투르기를 순간순간 벗어난, 과장되고 희화화된 장면들이 독특하게 가미돼 있고, 이 장치적 특징은 관객들과 주인공 사이를 일정하게 ‘소격’시키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현실’과 ‘초현실’을 과감하게 혼합시킨 박철수 감독의 <녹색의자>는 그 부자연스러운 접합이 까끌하고 낯설면서도, 우리 안의 ‘편견’과 우리 안의 ‘사랑’의 모습들을 진실하게 꺼내보인다. ‘문희’일수도, ‘현’일수도, 아님‘진’일수도, 그도 아니면 어떤 연인의 주변인물인 바로 당신에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