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천년의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를 살펴보면 예전에 비해 매우 다채롭고 넓은 시각의 후보 지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후보 지명이 유력시되던 [그린 마일]의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이 쓴잔을 마시고, 첫 데뷔작을 선보인 샘 멘더스(아메리칸 뷰티)와 스파이크 존스(존 말코비치 되기)가 후보에 오르는 이변을 낳았습니다.
전통적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의 영예는 작품상의 영예를 안은 작품의 감독이 수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작년 아카데미는 작품상에 [셰익스피어 인 러브]를, 감독상에 스티븐 스필버그(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선정해 변화의 조짐을 선보였습니다.
물론 예전에도 작품상과 감독상 수상이 다른 작품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90년대에 들어서 두 부분이 거의 동일시되는 결과가 주였던 것에 비해 작년에는 약간 의외의 결과를 낳았던 것이죠.
새천년 아카데미의 선택은 어떤 것일까요?
수많은 명감독들 중에 다섯 명만이 후보지명되는 부문이라는 이점이 있는 만큼, 신중한 선택이 필요합니다.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이 선호하는 감독이 수상하겠지만, 감독 자신이 쌓아온 세월과 노력들을 한번쯤 생각한다면 오스카라는 트로피를 수상하는 것 못지않게 감독의 땀과 눈물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다섯 후보들을 살펴볼까요?
처음으로 소개해드릴 감독은 올 아카데미 최다 후보의 영예를 안은 [아메리칸 뷰티]의 샘 멘더스입니다. 샘 멘더스는 이번 작품이 첫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다섯 후보 중에서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습니다. 영화 관객들에게는 비교적 낯선 이름인 그는 니콜 키드만의 누드 출연으로 화제를 모았던 [블루 룸] 등을 통해 브로드웨이에서 최고의 명성을 쌓아온 연출가 출신입니다. 브로드웨이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라고 불릴 정도라고 하니 유능한 연출가임은 의심해볼 여지가 없는 것 같네요. 애초에 스필버그가 메가폰을 쥐려 했던 [아메리칸 뷰티]가 스필버그의 제안으로 샘 멘더스에게 돌아간 것은 샘 맨더스에게 행운의 출발점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대부분 영화를 처음 찍는 신인 감독들은 제작비도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어렵게 감독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지만, 샘 멘더스는 스필버그라는 든든한 조력자와 최고의 각본을 만나 작품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연극감독 출신답게 [아메리칸 뷰티]는 매우 연극적인 요소들로 채워진 작품입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두드러지는 클로즈업은 인물의 심리를 극대화할 수 있는 효과를 불어 넣습니다. 완벽주의자로 소문난 감독답게 조금이나마 맘에 들지 않는 장면은 수없이 거듭하여 다시 찍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샘 맨더스의 고집이야말로 [아메리칸 뷰티]를 세기의 걸작 반열에 올려놓은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데뷔작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완벽할 정도의 소름끼치는 걸작을 만들어낸 샘 맨더스의 앞날을 지켜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일 것입니다.
두 번째로 소개해드릴 감독은 [인사이더]의 마이클 맨입니다.
[라스트 모히칸], [히트], [맨 헌터] 등을 통해 국내에서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마이클 맨은 흥행성과 작품성을 고루 갖춘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단의 주목에 비해 관객들의 평가가 다소 차갑다는 것이 마이클 맨의 영화가 극복해야 할 점으로 보입니다. [인사이더]에서도 이런 점은 두드러집니다. LA비평가 협회와 전미 비평가 협회에서 작품상을 거머쥐는 등 평단의 열광적인 찬사를 이끌어낸 반면, 2000만불도 벌어들이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마이클 맨 감독의 스타일이 너무 지루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연출 철학을 이해한다면, 그의 작품이 놀랍도록 치밀하고, 완벽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작품에는 출연한 배우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히트]역시 인물들의 감정과 갈등, 해결의 실마리와 고조 등이 매우 치밀하게 살아있는 보기드문 수작입니다. 단순히 사나이들 사이의 비장미만이 넘쳐 흐르는 액션 느와르와는 달리 마이클 맨은 인물들 사이의 감정의 교류를 놀랍도록 세밀하게 담아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리는 [인사이더] 역시 이런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번 후보 중 가장 독특한 사람은 스파이크 존스일 것입니다.
배우 출신인 스파이크 존스 감독은 첫 연출작을 위해 많은 작품의 출연마저 포기했다고 합니다. 최근 [쓰리 킹스]에서 어벙한 군인으로 출연한 그는 이 작품의 각본을 접한 후 찬사를 내질렀다는 군요. 타인이 되고 싶은 욕망을 기발한 발상과 재치로 조명한 작품으로, 숀 펜이나 브래드 피트가 카메오로 출연하기를 자청하는 등 개봉 전부터 주목받아온 이 작품은 바로 [존 말코비치 되기]입니다. 카메론 디아즈와 존 쿠삭, 캐서린 키너 등의 배우들이 평소의 이미지를 깨는 연기를 선보이며,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화제와 찬사를 불러일으킨 작품입니다. 영화 역사상 가장 기발한 작품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작품으로,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가 미치지 못하는 재치와 치기, 철학적인 사유까지 이끌어내는 놀라운 작품입니다.(한국에서는 5월에 개봉될 예정입니다.) 첫 연출작으로 감독상 후보에 오른 스파이크 존스는 이런 찬사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배우는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섯 명의 후보 가운데 가장 어리고 경력도 짧지만, 이번 노이네이트를 거울삼아 좋은 작품을 만들수 있는 감독이 될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번 아카데미에서 스파이크 존스의 수상 소식은 다소 멀게 느껴지지만, 이 기회를 통해서 반드시 그에 대해 주목해야만 할 것입니다.
오손 웰즈와 우디 앨런을 잇는 재능을 갖추고 있으니까요.
작년 여름에 혜성같이 등장한 감독은 분명히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일 것입니다. 인도의 영화학도 출신인 그는 [식스 센스] 단 한편의 영화를 통해 흥행과 평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사로잡았습니다. 여름용 영화라는 약점을 딛고, 아카데미 6개 부분에 올라 다시 한 번 화제의 도마 위에 올라있는 감독입니다. 지난 겨울에도 가족 영화 [스튜어트 리틀]을 각색한 나이트 샤말란 감독, 다시 한 번 그에게 행운이 찾아올지 기대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카데미 7개 부분에 후보 지명된 [사이더 하우스]는 미라맥스의 로비로 인해 후보 지명되었다는 소문에 시달리고 있는 작품인 탓에, 감독 라세 할스트롬의 수상 여부는 다소 희박해 보입니다.
특히 [개같은 내 인생]과 [길버트 그레이프]같은 수작을 만들어냈지만, 미국 내에서 그리 주목받지 못한 것에 비춰볼 때 전작들에 비해 약간 못 미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사이더 하우스]가 이처럼 주목받는 것은 의외임에 틀림없습니다.
전통적으로 미국 출신 감독을 선호하는 아카데미 위원들의 취향을 고려해볼 때 스웨덴 출신의 감독이라는 점도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수상 여부는 희박하지만,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유럽 출신 감독의 명맥을 잇고 있는 라세 할스트롬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사이더 하우스]는 전세계인들에게 큰 호응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