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테러로 얼룩진 이라크 바그다드. 그 안에 폭발물 제거반 EOD 대원들이 있다. 영화는 사고로 팀장을 잃은 EOD팀에 제임스 중사(제레미 레너)가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폭탄 제거 능력은 자타 공인 최고지만, 남과 어울리는 능력은 최악인 그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동으로 팀원 샌본(안소니 마키) 하사, 엘드리지(브라이언 개러티) 상병과 사사건건 부딪친다. 죽을 고비를 함께 넘기며 그들의 사이는 점차 호전되지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들의 관계를 다시 위태롭게 한다.
<허트 로커>는 얼마 전 개봉한 <그린 존>과 배다른 형제 같은 영화다. 이라크 전쟁의 비극이 낳은 작품이라는 점.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는 점은 두 영화의 교집합이다. 하지만 액션 장르를 빌어 ‘그린 존(안전지대)’ 속에 있는 타락한 미국과 그 시스템을 고발한 <그린 존>과 달리, <허트 로커>는 ‘레드 존(Kill zone)’으로 걸어 들어가는 또 다른 미국(병사)을 감싸 안으며 노선을 달리한다. <허트 로커>는 전쟁의 옳고 그름을 가치 판단하지는 않는다. 의식적인 선동을 하지도 않는다. 미국식 영웅을 만들 생각 따윈 더더욱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영화는 전역을 향해 하루하루 버텨가는 EOD대원들의 시간을 함께 하며, 그들의 내면을 파고든다.
실제 이라크 종군 리포터로 활약한 마크 보울의 시나리오에 긴장감을 붙이고, 유머를 덧댄 이는 여성 감독 캐서린 비글로우다. 여성 감독이 만든 전쟁영화라는 점에서 <허트 로커>는 이목을 끌었지만, 사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성별이 아니라, 그녀의 성장이다. 캐서린 비글로우는 오래 전, <폭풍속으로> <K-19 위도우메이커> 등을 통해 이미 ‘여성도 선 굵은 남성영화를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 감독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성별에 집중하는 건, 유통기한 지난 이슈거리를 놓고 뒤늦게 왈가왈부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허트 로커>에서 비글로우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남성들의 세계를 바라보는 한 단계 진화된 시선이다. 남성적인 소재를 남성보다 더 남성적이고 대범하게 풀어내왔던 비글로우는 <허트 로커>에 다다라 여성 특유의 섬세함까지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아드레날린 넘쳤던 예전 액션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에 정중동의 미학이 돋보이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하는데, 여기에는 <그린 존>의 촬영 감독이기도 했던 배리 애크로이드와 세계적인 음향 감독 마르코 벨트라미의 합류가 한 몫 했다.
이들의 만남은 정적인 움직임을 역동적 이미지로 변환시켜낸다. 쇼트와 쇼트, 씬과 씬이 이어질 때 발생하는 묘한 긴장감이 예사롭지 않고, 폭발의 순간 튀어 오르는 파편하나까지 세세하게 포착해 내는 카메라 테크닉은 섬세하기 이를 데 없다. 지루하게 늘어질 수 있는 폭탄제거 과정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음향 효과 또한 빼놓은 수 없는 <허트 로커>의 장점이다. 특히 주인공이 폭파물을 향해 가는 장면 사이사이에 삽입된 주인공 1인칭 시점과 핸드헬드 기법은 인물의 현장감을 스크린 밖으로 고스란히 전달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평범한 장면 속에서도 긴장감을 끌어 올리는 게 연출의 힘이라면, 그 순간들에 흥미를 더하는 건 주인공 제레미 레너의 치밀한 연기 기술덕분이다. 방호복 하나에 의지한 채, 폭발물을 향해 유유히 걸어 들어가는 그의 모습은 흡사, 적진 한 복판에 혈혈단신으로 진입하는 무사의 모습과 다름없다. 차이라면 ‘살기위해 싸우’는 무사와 달리, 제임스는 ‘죽자고 덤빈다’는 것인데, 이것이 이 영화의 긴장과 유머를 낳은 동력이 된다. 일상에서 쉽게 흥분하다가 위기의 순간에서는 그 누구보다 침착한 모습을 보이고, 동료들에게 안하무인처럼 굴다가도 길거리 소년에게 형처럼 장난치는 양극단의 얼굴을 보이는 그는 영화 전체에 개성을 부여한다.
“나이가 들수록 좋아지는 건 적어진단다. 내 나이 정도 되면 한 두 개 정도 남을까. 내 경우엔 하나뿐이야” 일상으로 돌아 온 제임스가 아들에게 하는 말이다. 이라크를 떠난 후에야 제임스는 자신이 쥐도 새도 모르게 전쟁이란 마약에 중독됐음을 깨닫는다. 결국 그는 다시 전장으로 돌아간다. 국가의 강요에 의해서도, 투철한 애국심이 있어서도, 생명에 대한 인간애가 넘쳐서도 아니다. 이젠, 그 곳이 아니면 삶의 의미가 없기에 위험천만한 ‘킬 존’으로 돌아간다. 카메라는 마지막, 폭탄제거를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제임스의 얼굴을 잠시 클로즈업 한다. 그때 그의 얼굴에서 발견되는 건, 놀랍게도 환한 미소다. 뒤늦게 생각한다. 내가 잘못 봤다고. 그건 환한 미소가 아니라,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강한 냉소였다고.
2010년 4월 21일 수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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