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라는 여인네의 생에 능통하지 못해도 그녀가 이 정도의 대사는 품을만한 대범함이었음은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황진이는 과거의 실존이자 현실의 허구다. 역사적 실존 인물이라는 뼈대에 소설, 드라마 등의 허구적 살점이 발라지며 황진이란 판타지는 지속적으로 현실에 재구성된다. 남성 권위가 절대적이던 조선 시대에 여성이라는 선을 곱고도 매섭게 살린 황진이는 작가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극대화시키는 캐릭터임에 틀림없다. <황진이>도 마찬가지다. 이북 작가 황석중의 소설 ‘황진이’가 선천적인 출생의 비밀이라면, 작가적 상상력의 잉여산물이 캐릭터를 살피는 관점의 재창조로 승화됐음은 영화 <황진이>가 선택한 후천적 삶이다. 불과 몇 달 전, 브라운관으로 등장했던 이 여인네의 자태에 열광했다면 <황진이>는 당신의 티켓 구매 욕구를 자극할 법도 하다. 그러나 그 자태는 사뭇 다르다. 당신이 아는 <황진이>를 떠올린다면.
일단 <황진이>는 100억 원이라는 제작비가 어떻게 쓰였는지 스크린에 정산한다. 조선이라는 과거를 고스란히 증명하는 시대상과 더불어 <황진이>가 황진이(송혜교)라는 인물을 어떤 시점에서 조명하는가라는 명제의 미장센이 되는 의복과 장신구, 특히나 몇 인분의 머리카락이 소모되었을 지가 궁금한 가채의 화려함은 <황진이>가 뿜어내는 당돌한 기운을 보좌하는 사치스럽지 않은 화려함이다. 또한 결말부에서 스크린을 병풍처럼 두르는 금강산 일만 이천 봉우리의 험준한 산세를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도 이색적인 묘미가 된다.
하지만 <황진이>라는 캐릭터가 지니는 반시대적 매력이 충분하지 않음은 <황진이>라는 영화의 전반적인 매력까지 상쇄시키는 느낌을 준다. 과연 황진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재발견인가라는 물음표에 <황진이>의 느낌표가 흐릿해보이는 건 기존의 캐릭터가 지닌 이미지의 원색이 강렬해 상대적인 대조 욕구를 자극해서가 아니다. <황진이>가 표면에 내세우는 이면적인 색채가 진부해서 큰 감흥을 부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자로서의 황진이를 조명했다는 <황진이>는 시대가 아닌 개인으로서의 여성상에 초점을 맞췄다. 이는 원작 소설의 영상화 작업이라는 점에서도 일맥상통하다. 하지만 소설이 문학적인 텍스트를 취함으로써 황진이라는 그릇의 깊이를 충분히 제시하고 순정이라는 색채를 섞어 넣었다면, 영화는 황진이의 순정을 오롯이 세우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물론 벽계수를 농락하는 대범함과 “기생년을 이토록 어렵게 품는 사내가 또 어디 있다오?”라며 희열(류승룡)에게 앙칼진 한마디를 날리는 모습은 호쾌한 재미를 주나 지속되는 캐릭터적 매력을 형성하진 못한다. 이는 황진이라는 캐릭터의 재발견이라는 목적 달성의 역행, 즉 반감된 매력에 대한 씁쓸함이 감돈다. 물론 원작의 주동인물이 황진이보다 놈이(유지태)에 가깝다는 점이 영화의 연출에 영향을 미쳤겠지만 카메라의 동공은 황진이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적 재구성은 시점에 대한 명백한 근거를 제시했어야 했다.
물론 송혜교의 연기는 <황진이>에 모자람이 없었다. 이는 결국 배우의 역량 부족이라기보단 캐릭터에 대한 접근에서 발생한 문제라는 것이다. 요구되지 않은 캐릭터적 접근을 배우가 좌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결국 매력적인 원작의 후방 지원이 전방에서의 지휘 불찰로 엇갈린 사연이다. 충만한 미장센과 배우들의 연기적 화력도 너끈하지만 구성의 체계가 극적이지 못한 건 아이러니하다. 결국 <황진이>는 절반의 성과다. 황진이의 주변부를 채우는 것에 성공했지만 정작 황진이는 어중간하다. 내면에 품은 순정의 편린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순정 그 자체에 매달리다 못해 휘둘리는 인상을 주는 여인을 과연 황진이라고 말할 수 있을 지가 의문이다. 140여분에 넘는 러닝타임 동안 확인되는 건 황진이에 대한 고증 위에 입혀진 신파일 뿐, 결국 황진이의 내면에 접근하지 못한 <황진이>는 눈길을 자극하는 수준 이상이 되지 못하고 아련해진다.
2007년 5월 25일 금요일 | 글: 민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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