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은 예리한 칼이 되어 일상적인 통념을 무너뜨린다. ‘박진표’ 감독의 장편 데뷔작 <죽어도 좋아>는 분명 그런 분류의 영화였다. 욕정이 없는 사람을 다른 말로, ‘노인’이라고 맘대로 생각했던 우리의 편견을 그는 이 한편의 영화로 통렬하게 비웃으며 깨버렸다.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그려낸 <죽어도 좋아>을 보고, 우리는 리얼리즘에 입각한 사회성 강한 작품을 그가 앞으로도 만들 것이라 (여전히 맘대로) 예상했다.
에이즈에 걸린 매춘부를 사랑한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 ‘에이즈’라는 말만 빼면 참 뻔한 이야기다. 요즘은 이런 얘기 영화에서보다 TV드라마에서 더 자주 등장해 여자의 신분과 남성의 사회적 지위만 알면 내용도 안 보고, 주인공들의 대사를 읊을 수 있을 정도다. 통속적인 사랑이야기의 달인인 관객들을 상대로 제 아무리 ‘전도연’, ‘황정민’이 출연한다 할지언정 구구절절한 신파의 그 뻔함, 어디 가겠어!? 그런데 어디 안가더라. 가기는커녕 사람을 울리다 웃게 만들어 거시기에 털 날 지경으로 몰아붙인다.
예쁜 얼굴로 이런 촌구석에서 다방레지일 할 사람으로 안 보이는 ‘전은하’(전도연)와 혼자 늙어가는 급한 마음에 베트남까지 신부 찾으러 갔던 농촌 총각 ‘김석중’(황정민)의 사랑을 그린, 박진표 감독의 <너는 내 운명>은 예상과는 달리, 통속적이면서도 진부함은 제거된 신파 멜로영화다. 감독의 전작을 봐서는 드라마틱한 멜로영화를 상상하기보다 현실성이 가미된 홍상수식 사랑이야기 혹은, 다큐멘터리 기법이 가미된 리얼감동 드라마를 먼저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게 우리의 예측을 벗어났든 간에 석중과 은하의 사랑은 ‘사랑’보다는 사람과 사람이 맺은 인연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진심’을 담아낸 작품이다.
그들의 사랑 이야기기 가식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건, 우리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에이즈 바이러스 보균자 여성의 매춘행위를 드라마의 모티브로 삼은, 영화제작 배경이 심심치 않게 작용했을 게다. 순수한 사랑이라고 관객 스스로 주입하듯 애쓰면서 볼 필요도 없이, ‘은하’가 한 남자에게 받는 사랑은 과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녀가 아무리 예쁘고 싹싹하고 기구한 팔자의 여성이라지만 다방레지에서 매춘부로 전락하는, 거기다가 전 남편과의 지저분한 관계로 인해 여관방에서 헐떡이는 모습들은 그리 애달프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렇듯 한 여성에 대한 차가운 시선 위에 감독은 이중적으로도 남성의 따듯한 시선을 그 위에 덮어 버린다. 속죄 받을 길 없는 여자의 천함이 남성의 순수한 사랑으로 역시나! 구원받는다. 페미니스트는 아니더라도 여자의 신분과 상황 그리고 남성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대비는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설정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성차적인 입장을 배제하더라도 상투적인 이야기에 진심을 얹혀 사랑의 진정성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너는 내 운명>은 놀라운 작품이다.
통속이 과해 신파로 전락하는 위험한 지점에서 감독은 여성의 심리를 대변하지 않고 남자의 강함, 즉 남성성을 부각해 이 사랑에 운명을 건 석중을 입체적으로 영화 속에 묘사하고 있다. 한 사람을 향한 일편단심이 존재할거라 누구나 생각하지만 그게 매체의 힘을 빌려 걸러지게 되면 그 ‘현실성’을 부인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박진표 감독은 영화 초반에 결정적인 순간, 예를 들면 고백씬 같은 감정의 폭발이 보이는 장면마다, 카메라를 인물에게서 멀리 놓고 바라본다. 다큐멘터리적인 기법으로 찍은 몇몇 장면은 내용의 진실성을 살려준다. 이로 인해 은하에게 향한 석중의 감정이 극 안에서 현실감 있게 살아나자 중반 이후부터는 카메라가 인물에 밀착해도 ‘신파’의 억지성에 이야기가 말려들어가지 않는 효과를 거둔다.
어떻게든 일상의 디테일 안에 ‘사랑’을 구겨 넣으려던 쿨 한척 하는 멜로영화보다 세련되기는커녕 투박하기만 한 <너는 내 운명>이 마치 새로운 형식의 영화처럼 다가오는 이유는 아무도 담아내지 못한 ‘진심’을 담아냈기 때문이리라. 가장 상업적인 장르인 멜로를, 그것도 신파로 몰고 가면서까지 얻어낸 관객의 눈물은 확실히 진짜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