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 17일 개봉) -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거장'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 5월에 열린 칸영화제는 아마도 역대 행사중 가장 도발적인 영화제로 기억될 것이다. 부시를 향한 증오와 조롱을 집대성한 <화씨9/11>의 황금종려상 수상, 칸이 결코 환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장르 영화'인<올드 보이>의 심사위원 대상 수상. 전세계는 칸의 결정에 충격을 받았으며 올해 영화제는 가장 뜨거웠던 행사로 기억되었다.
하지만 이번 칸영화제가 충분히 뜨거울 거란 사실은 이미 예견돼 있었다. 칸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나쁜 교육>.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이 신작은 영화제를 달구어 놓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으며 그런 미더움은 공식 상영 후 현실이 되었다. 최근 10년간 칸 개막작 중 최고의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은 <나쁜 교육>은 '프리미어' '포지티브' '텔레라마' '시놉시스' 와 같이 유력한 매체로부터 별 4개 만점을 받았던 것. 아울러 <나쁜 교육>은 감독 자신의 자전적인 성장 배경이 녹아든 작품이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나쁜 교육>은 알모도바르 감독 고유의 영화적 취향이 조화롭게 수렴된, 이를 테면 '도발의 완성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화. 여전한 파격적인 소재,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파열음은 이전보다 잦아 들었지만 그 청명함은 오히려 과거의 작품들을 뛰어 넘는다. 데뷔작부터 가장 최근작인 <그녀에게>까지 꾸준히 이어진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 그리고 작품을 더할수록 깊이가 느껴지던 통찰. <나쁜 교육> 역시 그런 점에서 영락없는 알모도바르 작품이다.
주제를 담아낸 형식 역시 참신하다. 멜로와 누아르, 현재와 과거, 사실과 허구가 자유분방하게 섞인 구성은 포만감을 안겨주고 도발과 서정이 공존하는 영상은 다층적인 감상을 안긴다. 감독의 영화에서는 음악 역시 이야기와 영상의 조력자로만 만족하지 않는다. 소년의 청아한 노래 소리와 심금을 울리는 가사는 그것 자체로 이야기가 되고 풍광이 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를 주저없이 '거장'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 바로 <나쁜 교육>에 그 해답이 있다.
- 네 명의 남자, 네 가지 욕망 애증과 질투로 색칠된 마뜨료쉬까
"<나쁜 교육>은 우리의 과거 기억이 우리 머리 속에서 재구성되어 어떻게 한 편의 영화로 탄생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모든 과정은 "과거는 결코 바꿀 수 없다"는 고통스런 인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 피터 브래드쇼, 가디언 -
<나쁜 교육>은 이나시오와 엔리케의 어린 시절(사실)과 이나시오가 자신의 과거에서 영감을 얻어 쓴 시나리오(허구), 엔리케가 이나시오의 소설을 영화화 하면서 드러나는 진실(사실) 등 다층적인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복잡한 구성은 하지만, 결국은 중심이 같은 삼각구도로서 세 가지 스토리는 하나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영화는 결국 네 명의 남자 이나시오, 엔리케, 후안, 마놀로 신부(베렝게)- 각자의 욕망을 전시하면서 그런 욕망으로 인한 파멸의 궤적을 쫓고 있는 것이다.
마놀로 신부는 어린 이나시오에게 마음을 뺏겨 집착한 나머지 이나시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지만 신부복을 벗고 후안에게 빠져 들면서는 사랑의 포로로서 희생자가 된다. 영화 배우인 후안은 노래, 글쓰기 등 여러모로 자신보다 재능이 뛰어난 형 이나시오을 질투하고 형이 마약, 여장 등으로 가족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자 그를 미워하는 이유를 스스로 정당화시킨다. 그리고 엔리케의 욕망의 대상이 됨으로써 형에게 복수하려고 한다. 엔리케는 영감을 얻기 위해 스크랩한 '악어를 끌어안은 채 악어에게 먹히는' 여인처럼 자신의 모든 행동을 인식하지만 역시 후안에 대한 욕망을 의지만으로 피해가지는 못한다.
<나쁜 교육>의 이런 이야기 구조는 러시아의 전통 인형인 마뜨료쉬까(똑같은 모양의, 크기가 다른 인형이 서로 서로 안에 숨겨져 있는)를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인형에 색칠된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은 각각 피와 곡식, 물과 화려한 꽃을 상징하는데, <나쁜 교육>의 화려한 영상미와도 잘 어울린다.
- 도발과 관능을 품은 서정, 매혹적인 영상에 매료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작품. 이 서명만으로 이미 영화는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다. 조건반사처럼 그에게서 도발적인 성 정체성 탐구, 지칠 줄 모르는 멜로에 대한 열정,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 고독과 열정의 불협화음, 탐스럽고 감각적인 영상 등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나쁜 교육> 역시 이러한 그의 색깔이 그대로 드러나 있지만, 멜로에 '누아르'를 혼합 시킴으로써 '서정적 도발'이라는, 약간은 이율배반적인 분위기를 창조해냈다.
한 여름, 강가에서 자맥질에 몰두하고 있는 소년들. 알모도바르는 영화 속에서 그 순수한 관능을 그대로 포착해 낸다. 이나시오와 엔리케가 첫눈에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는 축구시합 장면 역시 마찬가지. 카메라는 슬로우 모션으로 두 소년 사이의 이상기류를 놓치지 않고 잡아낸다. 한편, 16년 후 갑자기 나타난 이나시오가 수영장에서 엔리케를 '유혹'하면서 생기는 성적 긴장감을 표현할 때도, 감독은 결코 조바심을 내는 법이 없다.
하지만 이런 서정들에는 항상 도발이 내포되어 있다. 수영하는 소년들의 평화로운 아름다움을 쫓던 카메라는 마놀로 신부의 욕망에 의해 두 동강이 나는 이나시오의 고통을 잡아 내고, 수도원 축구 경기는 그 둘을 갈라 놓을 마놀로 신부의 엄격한 통제 안에 이루어지며 수영장 씬은 비밀을 안고 있는 이나시오와 그 비밀을 덮어둔 채 부러 유혹에 빠지려 하는 엔리케의 위험한 욕망의 조짐을 함께 암시하기 때문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서정'과 '도발'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영상. <나쁜 교육>이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중 가장 풍만한, '도발의 완성작'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 영혼을 울리는 천상의 목소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 리버'
달빛 강물, 내 맘에 흐르네. 난 결코 휩쓸리지 않으리 거친 물결에 흙탕물을 싣고 달빛 강물은 끝없이 내 맘속에 흐르네 강이여, 달이여, 나의 주님은 어디에 계신지 말해다오 난 정말 알고 싶네. 어둠 속에 숨겨져 있는 그 진실이 - 문 리버-
정원사여 정원사여 매일 밤낮 꽃밭에서 그대 사랑의 불꽃이 꽃잎 붉게 물들이네 꽃잎마다 서려있는 그대 사랑의 미소 희망 가득한 천국을 향한 그대의 간절한 눈길로 꽃들은 어느새 활짝 피어나고 은혜로운 그대에게 향기를 선사하네 정원사여 정성껏 꽃을 가꾸어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라 - 정원사-
<그녀에게>에서 <쿠쿠루쿠쿠 팔로마Cucurrucucu Paloma>란, 가슴을 아리는 애수곡으로 영화에 진한 감성을 불어 넣은 알모도바르 감독이 이번엔 소년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스크린에서 들려준다. 마놀로 신부의 기타 반주에 맞추어 '문리버'를 부르는 소년의 청아한 목소리는, 시적인 가사와 약간은 긴장감이 베어 있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불안하지만 동시에 평온에 젖는 순간을 제공한다.
또한 나폴리 민요인 '돌아오라 소렌토로'(나폴리 풍경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면서 떠나가는 애인에게 그곳에서 기다릴 테니 돌아와 달라는 내용)에 마놀로 신부가 직접 노랫말을 붙여 자신의 생일에 이나시오로 하여금 부르도록 한 '정원사'도 빼놓을 수 없는 곡. 신부는 스스로를 정원사에 비유하고 소년을 꽃에 비유했는데, 자신의 욕망에 도취되어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위선자의 모습과 너무나도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소년의 순수한 모습이 대비돼 아픈 감동을 자아낸다. 매 작품마다 놀라운 음악적 심미안을 자랑해온 알모도바르. 그는 <나쁜 교육>에 와서 기어이 천상의 목소리를 들려 주고야 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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