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동화로 되살아난 헨젤과 그레텔, 그러나 새로운 이야기
19세기 초반 독일 민담의 채록에서 출발한 그림동화는 기근과 전쟁이 다반사였던 당시 유럽의 참혹한 삶의 조건을 담고 있다. ‘과자로 만든 집’이란 동화적 장치에 가려져 있지만, <헨젤과 그레텔>은 굶주린 부모가 다시는 집을 찾아오지 못하도록 깊은 숲속에 아이들을 버린 데서 시작되는 이야기. 영화 <헨젤과 그레텔>은 동화에서 모티브를 빌려 오되 동화의 해피 엔딩을 되짚어 보는 데서 시작한다. 만약 ‘헨젤과 그레텔’ 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 한 채 아이들끼리 숲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다면? 이라는 잔혹한 상상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깊은 숲에 남겨진 두려움과 사랑 받고 싶은 순수한 소망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과제와 만났을 때, 아이들의 무기인 상상력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영화 <헨젤과 그레텔>은 환상적이면서도 섬뜩한 ‘잔혹동화’로 그 아이들의 속내를 들여다 본다.
연민과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헨젤과 그레텔>의 세 아이들
영화 <헨젤과 그레텔>의 아이들은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 가장 큰 소망은 당연하게도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소박한 것이다. 하지만 어른처럼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방식을 알 리 없는 아이들은 아이들 특유의 상상력을 동원해 자기들 밖에 길을 모르는 숲과 그림처럼 예쁜 집을 만들어 엄마 아빠를 대신할 어른들을 불러 들인다. 선악의 구분조차 할 수 없는 아이들이기에 이들이 분노할 때 터져 나오는 에너지는 어른들을 두려움으로 몰아 넣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나쁜 아이는 벌을 받는데 왜 나쁜 어른들은 벌을 받지 않느냐?’는 아이들의 순진한 반문은, ‘행복한 어린 시절’을 타의에 의해 건너 뛴 이들의 현실과 맞닿아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 ‘그 세상의 아이들은 행복한가요?’라는 영화 속 영희의 대사는 아이들의 불행한 과거와 맞물려 강한 울림을 던지는 질문이다. 원작이 미처 전해주지 않았던, 아픈 현실의 이야기. 어느 시대, 어느 세상에서건 ‘헨젤과 그레텔’ 이 생겨날 수 있다는 작은 성찰에서 잔혹동화 <헨젤과 그레텔>의 이야기는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다.
아이들의 순진한 상상이 어른들의 악몽으로- 악몽의 네버랜드를 시각화한 프로덕션 디자인
동화 속 과자로 만든 집이 아이들을 유혹하는 마녀의 덫이었던 것과 정반대로 영화 속 ‘즐거운 아이들의 집’은 사랑해 줄 어른들을 불러 들이는 아이들 나름의 장치다. 하지만 아이들의 상상에서 빠져 나온 이 공간은 어른들에게는 낯설고 기이하다. 언뜻 봐선 아이들의 천국. 집 안은 사람보다 더 큰 곰 인형, 갖가지 기차, 자동차 등 온갖 종류의 장난감으로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곰 인형의 배가 터져 있고, 벽지 속 토끼가 빨간 눈을 치뜨고 노려보는 등 공간과 소품은 조금씩 왜곡되어 있다. 게다가 식탁은 알록달록한 과자 일색이다. 아이들의 이상향이지만 발을 들여 놓으면 빠져나갈 길 없는, 어른들에게는 악몽으로 직결되는 집과 숲. 영화 속 공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아름다우면서도 기묘한 기운을 뿜어내는, 낙원과 악몽의 이중성을 띄고 있다. 아이들의 ‘잔혹한 상상’을 공간으로 그려낸 <헨젤과 그레텔>의 숲과 집은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리드하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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