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년대의 베니스를 무대로 역사상 최고의 바람둥이, 호색한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그 유명한 카사노바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 때 성직자를 꿈꾸었고, 17세에 법학 박사학위를 받은 천재... 미친듯이 여자들를 사랑한 감각주의자, 그러나 그보다 자유를 더욱 사랑한 진정한 자유인. 200년의 시공을 넘어 그의 거짓과 진실이 마침내 베일을 벗는다.
<길버트 그레이프>, <사이더 하우스>, <초콜렛>등의 작품을 발표, 아카데미 후보에도 올랐던 라세 할스트롬 감독이 이번엔 르네상스 시대의 밀정이자 군인이자 작가, 철학자, 탐험가였던 희대의 엽색꾼 쟈코모 카사노바의 전설을 날카로운 풍자가 담긴 세련된 현대식 코미디로 만들어 내놓았다. 카사노바의 일대기가 영화로 각색된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곤경에 처한 카사노바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킨 작품은 없었다. 이 영화 속에서 카사노바는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기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억압과 관능, 거짓과 진실, 사랑과 욕정이라는 상반적 개념들간의 갈등을 희화적으로 풀어낸 이 작품은 감독이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들 중, 가장 경쾌한 로맨틱 코미디로 자리매김할듯 하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점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카사노바를 조명했다는 것이다. 작가들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에 젊음과 친근함과 현실적 인간미를 부여했다. 기존의 작품들과 달리 이 영화속에서 카사노바는 푸치 주교(제레미 아이언스 분) 일행에게 쫓기면서도 사랑을 찾아 헤매는 나약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겸비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속임수와 결투, 위선, 애타는 짝사랑 등 복잡한 삶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카사노바는 마침내 욕정과 진정한 사랑의 차이점이 뭔지를 깨달아가게 된다.
세계 최고의 연애술사는 어떻게 사랑에 빠지는가?
역사상 최고의 연애꾼은 어떻게? 누구와 사랑에 빠지는가? 그리고 사랑을 쟁취하기위해 때로는 고군분투한다는 이 작품의 컨셉은 시나리오 작가 킴벌리 시미에 의해 처음으로 태동됐다. 시미의 시나리오 초안은 하스 할스트롬 감독과 오랜 세월 함께 일해온 제작자 레슬리 홀러란의 관심을 끌었다. <사이더 하우스> <초콜렛> <쉬핑 뉴스>등을 할스트롬과 함께 만들었던 홀러란은 이 시나리오가 감독의 작품세계에 새로운 경지를 열어줄 좋은 계기가 될걸로 판단했다. '라세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생의 작지만 소중한 순간들을 잡아내는 감각이 뛰어난 감독이다. 이번엔 그가 로맨스와 방탕, 유머가 조화된 좀 더 큰 스케일의 스토리에 도전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감독 특유의 성찰은 이 작품속에서도 그대로 보여진다'고 홀러란은 설명한다. 시나리오는 곧 마크 고든 영화사에 팔렸다. 고든 역시 이 스토리에 매료됐다.
시나리오가 다듬어지는 과정에서 할스트롬 감독은 점점 더 이 작품에 깊이 빠져들었다. 재기 넘치는 대사, 날카로운 유머와 풍자, 경쾌한 터치의 로맨스가 시나리오 속에 멋지게 녹아있었기 때문. 감독으로서는 이런 작품이 처음이었지만 개성이 풍부한 캐릭터와 화려한 극의 배경은 감독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작품은 내게 하나의 새로운 이정표였다. 이렇게 적나라한 코미디는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다듬어져 나온 시나리오는 내용이 풍부하고 코믹하고 재기가 넘쳤다. 클래식 코미디에 드라마와 로맨스를 배합시켜 새로운 색깔을 만들어내는 작업은 내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하지만 난 그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결과는 대 만족이었다. 훌륭한 시나리오에 히스 레저를 비롯한 멋진 배우들이 <카사노바>를 탄생시켰다.
제작진으로서는 할스트롬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는 사실이 아주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의 작품엔 늘 마법적인 그 뭔가가 있다'고 제작자 고든은 말한다. '말로 설명할수 없는 즐거운 경이로움이랄까... 그의 영화는 재미있고 매력적이면서도 동시에 감동적이다. <개 같은 내 인생>을 본후 난 그의 팬이 됐다'
감독은 이 영화를 찍으며 유명한 고전 문학이자 헐리웃의 단골 리메이크 작이었던 작품을 새로운 시각으로 비틀어 볼수 있는 특권을 누린 셈이었다. 제작자 벳시 비어시는 이렇게 말한다. '카사노바의 이야기는 거짓과 진실, 가면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참모습 등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케 해주는 시대를 초월한 스토리이다. 영화 <카사노바>엔 자신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이 되기 위해 몸무림치는 많은 군상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결국 깨닫는 결론은 한가지, 진정 원하는걸 얻기위해선 자신의 모습을 찾아야한다는 것이다'.
검술가, 예술가, 천재, 그리고 언제나 사랑에 빠지는 남자 : 21세기형 카사노바
흔히들 카사노바를 희대의 호색한으로만 알고있지만 실상 그는 풍부한 지성과 날카로운 유머를 겸비한 법학 박사이자 군인이며 마술사, 작가, 철학자. 스포츠맨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여인들을 매료시키는 마력을 가진 남자이자, 한 여인에게 만족하지 못한 정열의 화신으로 세인들의 뇌리에 각인되고 있다.
이러한 카사노바란 인물의 특성을 잘 표현하면서도, 실연에 빠져 고뇌하며 변화하고자 노력하는 그의 또 다른 모습까지도 리얼하게 그려낼수있는 배우를 찾기위해 고심하던 제작진은 처음엔 3,40대 남자배우들을 물색했다. 하지만 히스 레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제작진의 생각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히스가 방으로 들어오는 순간, 우린 그가 바로 카사노바의 배역에 딱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유머있고, 매력적이고, 또 아주 유혹적인 남자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아함과 섬세함을 함께 갖추고 있었다'고 비어스는 회상한다.
레슬리 홀러란은 이렇게 덧붙인다 '처음엔 약간 나이가 있는 배우를 캐스팅하려했다. 하지만 젊고 섹시하고, 악동같은 매력을 지닌 히스 레저가 이 캐릭터를 맡음으로서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재밌고 로맨틱하게 만들어졌다'.
히스 레저는 드라마와 코미디를 적절히 섞을줄 아는 연기력 외에도 극중의 칼싸움이나 추격씬에 필요한 체력까지도 완벽히 갖춰, 제작진을 흡족케했다.
<기사 윌리엄>과 같은 코미디 물부터 <몬스터볼>같은 강렬한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에서 개성있는 연기를 보인바있는 히스 레저는 이 작품의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 단박에 매료됐다. 역사상 최고의 연애술사를 연기할 기회라는 점 또한 거부할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캐스팅된후 히스 레저는 카사노바란 인물속에 몰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카사노바가 쓴 일기와 자서전도 읽었다. '하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대로 따라하고 싶진 않았다'고 레저는 말한다. 전체적인 윤곽은 살리되, 좀더 현대적인 스타일의 플레이보이를 표현하고 싶었다는게 그의 말. '수천명의 여자들이 카사노바에게 매혹당한다. 그래서 간혹 그에게 넘어오지 않는 여자가 있을때 카사노바는 참지를 못한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흥미를 갖게되고 그녀의 마음을 얻기위해 어떤 일이든지 불사한다'.
지성과 고전미를 갖춘 베니스에서 가장 진취적인 신여성 : 프란체스카 역에 시에나 밀러를 캐스팅하다
신랄한 위트와 영리함, 게다가 고전적인 미모까지 갖춘 그녀는 베니스에서 가장 범접하기 어려운 여자.
할스트롬 감독은 시나리오를 읽을때부터 프란체스카라는 캐릭터에게 매료되어 이 배역을 맡을 특별한 여배우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카사노바의 삶을 바꿀만큼 파워가 있는 여자였다. 강한 의지력과 시대를 앞선 지성을 지닌 진정한 의미의 현대여성이라고 할수있다. 카사노바는 여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여자들과 소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프란체스카는 매우 흥미를 끄는 여성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작진은 카사노바의 카리스마에 견줄만한 배역을 소화할수 있는 여배우를 물색하던 중 신인 시에나 밀러를 발견했다. 매력적인 외모, 그리고 카리스마와 지성을 겸비한 배우면서도 아직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있지 않다는 점이 그녀를 캐스팅하게된 이유였다. 그녀의 신선한 아름다움은 카사노바의 허풍끼 있는 모습과 묘한 대조의 조화를 이룬다.
시에나 밀러는 한동안 현대물에 계속 출연해온 터라, 이 배역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을 땐 시대물에 출연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내심 하고 있었다고 한다. '프란체스카는 열정적이고 이지적인 페미니스트이다. 게다가 그녀가 살았던 시대는 18세기였다. 따라서 난 콜셋을 입는 시대물 출연이라는 소망을 이뤘고, 게다가 강한 여성상을 연기한다는 보너스까지 한꺼번에 챙길수 있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화려한 조역진 : 제레미 아이언스, 레나 올린, 올리버 플랫등의 연기파 배우들 포진
히스 레저와 시에나 밀러의 연기를 뒷받침해줄 조연진으로는 아카데미 수상 경력의 연기파 배우들과 코미디 연기의 대가들이 캐스팅되었다. 먼저, 아카데미 수상배우 제레미 아이언스가 극중 카사노바의 가장 큰 천적인 푸치 주교 역을 맡았다. 푸치 주교는 교황청에서 파견된 심문관으로, 방탕한 카사노바를 체포, 사형에 처하기 위해 그를 계속 추적한다. 감독은 아이언스의 트레이드 마크인 '냉정한 영국인 상'과 그의 캐릭터가 처한 황당한 상황이 만나면 재밌는 유머가 나올것으로 생각했다. 카사노바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푸치 주교는 번번히 뒷북을 친다. 그의 자신감과 오만함은 매번 웃음꺼리가 될뿐이다. 아이언스는 좌충우돌하는 푸치의 캐릭터가 또 다른 코믹 캐릭터 클라우소 심문관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한다. 늘 헛다리를 짚는다는 점에서... '푸치 주교가 그토록 카사노바를 못잡아먹어 안달하는것은 그에게 내심 질투를 느끼기 때문이다. 주교도 속으로는 카사노바처럼 뭇여인들의 사랑을 받는 젊은 매력남이 되고싶은것이다. 그는 실상 도덕적인 종교 지도자가 못된다. 출세가도를 꿈꾸며 바티칸의 명령에 따라 베니스로 왔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건 자신의 무사안일이다'
제노아의 '돼지기름 황제' 파프리찌오 역으로 캐스팅된 배우는 올리버 플랫. 파프리찌오란 캐릭터는 극중에서 아둔한 조롱거리로 등장한다. 그러나 제작진은 파프리찌오가 코믹하기만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아주 현실적인 인간상이어야 한다는것. 그래서 페이소스와 코믹함을 잘 조화시키는 배우 올리버 플랫을 캐스팅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 파프리찌오는 자신만만하고 거만한 인물로 캐릭터가 설정됐었다. 하지만, 그는 실상 자신감이 많이 결여된 사람이다. 게다가 카사노바에게 속은 끝에 복잡한 궁지에 몰리게 된다. 하지만, 그런 위기는 결국 그에게 전화위복이 된다. 덕분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게되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까지도 갖게 됐으니까...'라고 올리버 플랫은 설명한다'
프란체스카의 정혼자였던 파프리찌오가 막상 첫눈에 반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장모감 안드레아. 안드레아 역엔 레나 올린이 캐스팅됐다. '이 특이한 러브스토리에서 안드레아도 한몫을 단단히 한다'고 감독은 말한다. 감독과 올린은 영화 <초콜렛>에서도 함께 작업한 바 있다. 레나 올린이 말하는 안드레아는 시대와 지위라는 감옥에 갇힌 여인. '그녀는 상류사회 여성이지만 남편을 잃고 가난한 과부가 된 신세다. 속으론 뜨거운 열정을 갖고있지만 관습과 상황에 얽매어 아무것도 할수없는 여인인것이다. 그녀가 파프리찌오에게 반한건 그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카사노바와 맨처음 약혼을 했다가 나중엔 그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당돌한 처녀 빅토리아 역을 맡은 배우는 나탈리 도머. 연기학교를 갓 졸업한 새내기 연기자이지만 감독은 그녀가 외모나 재능면에서 빅토리아 역에 딱이었다고 말한다. 떠오르는 스타로 서슴없이 그녀를 평할 정도...
2004년에 런던의 드라마 아트 아카데미를 졸업한 도머는 최대한 자신의 여성적인 매력을 부각시키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남자를 유혹하는 나탈리라는 캐릭터가 매우 흥미로웠다고 말한다. 평소에 배워뒀던 펜싱 기술을 이번 영화에서 써먹게되어 더욱 기뻤다고...
또 한명의 떠오르는 스타는 지오반니 역을 맡은 찰리 콕스. 프란체스카의 남동생이자, 어떤 면에선 카사노바의 제자라고 할수있다. 런던에서 개인적으로 콕스를 오디션한 감독은 즉석에서 그를 캐스팅했다. '지오반니는 매우 흥미로운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엔 자신감 없고 수줍은 청년이었지만 점차 사랑을 다루는데 능숙한 연애술사로 변해간다'는 게 감독의 설명.
전작 <베니스의 상인>에서도 베니스에서 작품을 찍었던 콕스는 극중 누나인 프란체스카와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린 모든 남매 사이가 그렇듯, 겉으론 늘 티격대면서도 속으론 진심으로 서로를 아낀다. 하지만 지오반니는 누나보다 더 야성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그를 통해 관객들은 카사노바의 어린 시절을 유추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극의 양념격인 카사노바의 시종 루포 역으로는 재능있는 코미디언이자 성격파 배우인 오미드 쟐릴리가 캐스팅됐다. 카사노바 역의 히스 레저가 키 큰 금발의 미남 아도니스인데 비해, 시종 루포는 '머리 벗겨지고 짝딸막한 뚱보'로, 주인과 대조를 이룬다. 수많은 작품에서 개성있는 연기를 보여준 쟐릴리의 경력이 루포라는 캐릭터를 한층 빛나게 했다는 후문. 그는 다른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매력을, 근사한 스토리와 신,구 세대가 어우러진 멋진 캐스팅에 있다고 꼽는다.
사랑의 무대 : 18세기 베니스의 멋진 풍광이 현대의 스크린 속으로!
할스트롬 감독은 관능과 도덕이 충돌하던 시절의 베니스의 풍광과 분위기를 가능한한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원했다. 물론 제작 초반부터 촬영 장소는 정해져 있었다. 베니스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중 하나로 알려진 베니스인 만큼, 다른 곳에서 영화를 찍는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제작자 마크 고든의 말대로 카사노바와 베니스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 영화 <카사노바>에서 베니스라는 도시는 하나의 중요한 캐릭터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다.
가능한한 로케 촬영을 고집하는 건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특징이다. <사이더 하우스>는 뉴잉글랜드에서, <쉬핑 뉴스>는 뉴펀드랜드에서, <초콜렛>은 프랑스의 한 마을에서 촬영됐다.
감독은 베니스를 보는 순간 그 뛰어난 건축 미학에 반했다. 주택가의 좁은 골목길과 아름다운 다리들, 해안의 절경, 피아짜 산마르코와 낭만적인 운하 등은 이 영화에서 빼놓을수없는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영화는 베니스에서 100% 촬영된 몇 안되는 영화중 하나'라고 감독은 설명한다. '내가 원했던 리얼리즘과 유혹적인 환상의 비쥬얼을 모두 얻었다'는게 그의 자평.
영화의 미술은 프러덕션 디자이너 데이빗 그로프먼이 맡았다. 그가 할스트롬 감독과 함께 작업한것은 이번이 여섯번째. '할스트롬 감독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스토리를 가능한 한 솔직담백하게 화면에 펼친다. 그 점이 디자이너인 내겐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는 게 그로프먼의 말.
그로프먼은 300년 이상된 건축물들을 찾기 위해 감독과 함께 베니스 주변의 60여곳을 돌아다녔는데, 그런 곳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 영화속엔 유명한 베니스의 명소들이 많이 등장한다. 산타 마리아 성당과 세인트 마크 광장, 그리고 메이저 영화사가 제작한 영화속에선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피아짜 산 마르코와 팔라쪼 두케일 등이 그곳. 피아짜 산 마르코는 매일 오후마다 물에 잠기고, 팔라쪼 두케일은 핑크색과 백색이 어우러진 고딕풍 궁전이다.
디자이너 그로프먼에게 특히 애착이 가는 장소는 바로 운하. 운하에 떠있는 배들이야말로 베니스를 베니스답게 만드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그로프먼에 의하면 18세기엔 운하가 지금보다 많았고 다리의 수는 적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엔 배가 중요한 이동수단일 수 밖에 없었다.
수백년된 건축물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는덴 어려움도 많았다. '시대물의 분위기를 살리고 화면의 질감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스모크를 사용하고 싶었지만, 그러다 아름다운 옛 건축물들이 혹시라도 훼손될까봐 그럴수가 없었다'는게 그로프먼의 얘기.
어려움은 촬영감독인 올리버 스태플턴에게도 있었다. 스태플턴은 할스트롬 감독과 <사이더 하우스> <쉬핑 뉴스> <언피니쉬드 라이프>에서 함께 작업했던 바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베니스에선 자신이 평소에 사용하는 조명 테크닉을 쓰기가 힘들다는 것. 지어진 지 수백년이 넘어 구조가 약한 건축물 내부가 자칫 강한 조명 때문에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좀 더 창의성을 발휘할 수 밖에 없었다.
할스트롬 감독 역시 어려운 상황이 창의성을 되려 높여준다는 촬영감독의 말에 동감한다. '스태플턴과 난 좀 더 대담한 카메라 워크로 베니스의 새로운 모습을 화면에 담고자 노력했다. 우린 베니스가 지금까지 여러 영화를 통해 충분히 아름답게 표현돼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뭔가 색다른 시도가 필요했다. 그림 엽서나 책에서 보던 것과는 뭔가 다른 베니스만의 독특한 색깔을 표현하고 싶었다'
제작진이 베니스의 풍광에 마법을 불어넣기 위해 고군분투 할 때, 베니스는 이미 이들 모두의 마음에 마법을 걸었다. '제작진과 출연진 모두가 베니스와 사랑에 빠져버렸다'고 디자이너 스플레튼은 말한다. '그건 화면을 통해서도 확실히 보여진다. 배우들은 연출된 장소에서 촬영을 하고 있다기 보단 실제 18세기에 존재했던 베니스에서 실제로 살아움직이고 있는 느낌을 준다'는 것.
영화 <카사노바>에서 클라이맥스가 되는 배경은 바로 카니발 축제. 사육제 스타일의 이 축제가 열리면 베니스는 평소의 근엄한 옷을 벗고,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한다. 풍기문란이라 할만큼 남녀는 자유로워지고, 술과 음악과 온갖 놀이로 몇날 며칠밤이 지나간다. 때로는 6개월이나 축제가 계속된적도 있었다. 카니발은 계층간의 벽을 허무는 축제이기도 했다. 상류층 귀족들과 하층 빈민들이 익명이라는 가면뒤에서 함께 어깨를 부딪히며 어울렸던 것. 가면은 서로의 얼굴과 신분을 숨기고, 한발 더 나아가서는 상대를 속이는 수단이었다. 가면속에서 사람들은 유쾌하게, 때론 짖궂게 자신의 욕망을 표출했다. 카니발은 한마디로 낭만의 축제이면서 이중성과 거짓의 축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감독은 카니발의 스릴과 자유분방함을 가능한한 사실성있게 화면에 담기위해 피아짜 산 마르코에 실제로 카니발을 재연했다. 너무나 생생하게 재연된 카니발 축제를 본 베니스 시민들은 감동해서 눈물까지 글썽였다는 게 감독의 회고. '1800년대 이후 이런 행사가 치러진 적이 한번도 없었기에 시민들의 감회는 한층 새로웠을 것'이라고 감독은 말한다.
승마 바지, 드레스, 가발, 가면 : 완벽한 고증으로 만들어진 영화 <카사노바>의 의상
등장인물들이 서로 가면속에 신분을 숨긴채 사랑의 퍼즐게임을 벌이는 영화 <카사노바>에선 의상의 비중이 매우 클수밖에 없었다. 18세기에 유럽 패션의 중심부였던 베니스의 광장과 거리엔 늘 화려한 옷차림으로 단장한 매춘부들이 남자들의 시선을 유혹했다고 한다. 감독이 극중 시대 배경인 1740년대와 1750년대 베니스의 의상을 스크린에 옮길 디자이너로 선택한 사람은 아카데미 수상 경력의 실력파 의상 디자이너 제니 비번. '비록 코미디 성격이 짙은 영화지만 의상만큼은 고증에 충실하게 가자는 게 우리의 생각이었다'고 감독은 설명한다.
제니 비번은 이 영화가 고증에 철저한 시대물이면서 코미디물이라는 점에 큰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감독의 말대로, 코미디라고 해서, 웃음을 유발하기위해 의상까지 코믹할 필요가 없다는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의상이 제대로 갖춰졌을 때 그 웃음이 더 파워풀한 힘을 갖게 되기 때문.
비번은 의상 제작을 위해 당시의 예술 작품과 과르디, 카날레토, 피에트로 롱기등의 드로잉 작품들을 보며 당시 베니스에서 유행하던 색채의 감각을 익혔다. 그러한 고증 작업을 통해 그녀가 선택한 주요 색채는 불에 탄듯한 붉은 색(BURNT RED), 호박빛 노란색 (AMBER YELLOW), 터키 블루색 (TURKISH BLUE). 주요 출연자들의 의상은 모두 이 색깔들을 기본으로 해서 제작되었다.
비번은 당시 남성들의 의상이 무척 로맨틱하고 화려했다는 점에 놀랐다고 한다. '남자들은 치렁치렁한 치마를 입고 공작새처럼 걸었다. 카사노바로서는 그런 의상이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그런 옷을 입고 걸어다니려면 자연히 엉덩이를 흔들수밖에 없었을테니까... 한편, 여성의 의상은 허리가 길고, 풍성한 드레스였다.'
'당시 베니스 시민들은 카니발때 마음껏 화려한 패션을 뽐냈다. 멋진 의상에 가면을 쓰고 익명성이 주는 해방감을 만끽하며 축제를 즐겼던 것이다. 검은색의 긴 망토와 하얀 가면 차림으로 유령같은 모습을 연출하는 사람도 있었다. 거기다가 검은색 삼각모자를 쓰기도 했다. 이런 차림은 이태리 외의 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차림새다. 우린 <카사노바>에서 이런 기괴한 차림새를 적극 활용했다. 그 짖궂은 익명성이 속고 속이는 영화의 테마와도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카사노바의 의상은 명성에 걸맞게 아름다워야 했지만, 그렇다고 너무 멋을 부린 표시가 나선 안되었다. 그래서 우아하고 심플한 쪽으로 제작했다. '히스 레저는 굽이 높은 구두와 레이스 달린 의상을 즐기는 듯 했다. 게다가 6년간이나 현대 무용을 배웠기 때문에, 의상이 돋보이도록 아주 아름답고 유연하게 움직였다'
히스 레저 본인의 제의에 따라 비번은 극의 흐름에 따라 카사노바의 의상 색채를 바꿔나갔다. 붉은색 의상, 푸른색 의상, 회색 의상 등등으로... '옷 차림새는 그의 마음 상태를 말해준다. 느긋할 땐 셔츠가 바지 밖으로 늘어져있고, 양말은 말려져내려가 있다. 반면 외출할 땐 남의 시선을 의식, 격식을 갖춰 옷을 차려입는다'
모녀지간인 안드레아와 프란체스카의 의상은 스타일 면에서 큰 대조를 이룬다. '프란체스카는 학자이기 때문에 옷에 그다지 큰 흥미가 없는 여자다. 그래서 그녀의 의상은 극도로 절제됐으면서도 강한 인상을 풍기는 디자인을 선택했다. 얼핏 봐선 하인들의 옷과 다를 바 없이 검소해 보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옷감이 고급이라는 것이다. 반면 그녀의 어머니인 안드레아는 집안 형편이 기울게된 후에도 여전히 예쁜 옷을 좋아한다. 그래서 예전에 입었던 화려한 옷들을 즐겨입는다.'
'숫처녀' 빅토리아의 의상은 디자이너에게 또 다른 고민꺼리였다. 겉으론 순진한 숫처녀로 알려져있지만 정말 숫처녀인지는 수수께끼... 그런 빅토리아를 위해 디자이너가 선택한 색상은 분홍색이었다. '분홍색을 입은 나탈리는 물위를 헤엄치는 오리처럼 자연스러웠다. 내 선택이 옳았던 것 같다.'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신분을 속이기 위해 수시로 사용하는 가발은 마리아 테레사 코리도니의 작품이다. 다른 디자인 팀들과 마찬가지로 의상 디자인팀에게도 가장 큰 과제는 바로 '카니발' 장면이었다. 500여명의 엑스트라들을 분장시키기 위해 비번은 런던, 파리, 로마, 마드리드, 비엔나, 밀라노 등지에서 의상을 공수해 와야했다. 극의 리얼리티를 위해선 엑스트라들의 의상도 소홀히 할 순 없었다.
카니발 장면에서 등장 인물들은 각자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고 타인으로 행동한다. 디자이너에겐 의상을 통해 캐릭터들의 그런 숨바꼭질 게임을 표현할수있는 흥미로운 기회였다. '프란체스카의 평소 의상은 너무 단순,소박해서 남자 의상을 입어도 거뜬히 소화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카사노바가 파프리찌오 행세를 할 땐 아주 화려하고 요란한 의상을 입혔다. 내가 원한 것은 관객의 눈에 등장인물들이 자신이 행세하는 다른 인물처럼 보이면서도 자신의 원래 모습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카사노바가 남긴 유산
영화 <카사노바>는 사랑의 마술사로만 알려져왔던 카사노바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로 기존의 영화들과의 차별성을 선언했지만, 한편으로는 카사노바의 화려한 전설을 상당 부분 극속에 그대로 반영, 그의 명성을 되새기게 해준다. 수많은 소설과 연극, 영화를 통해 수없이 재탄생, 재해석돼온 카사노바는 가장 유명한 현대의 신화라고 할수있다. 하지만 그는 또한 놀라운 역사적 배경을 가진 실존 인물이기도 하다. 첩자였고, 군인이었으며 외교관, 작가, 탐험가이기도 했던 그는 어쩌면 가장 풍요로운 삶을 산 남자의 모델일지도 모른다. 그의 삶은 후세 사람들에게 방탕했던 한 남자의 연애 행각만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우린 그의 인생을 통해 계몽시대의 흔적과, 관습의 벽을 넘어 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한계의 극한점까지 자신을 몰고갔던 한 남자의 모습을 아울러 보게 된다.
카사노바의 사랑과 삶을 그린 영화로는 알프레드 디시 감독의 1918년작 <CASANOVA>를 비롯, 알렉산더 볼코프 감독의 1927년작 <CASANOVA-THE LOVES OF CASANOVA>, 밥 호프의 코미디 물인 1954년작 <CASANOVA'S BIG NIGHT>,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가 주연한 <CASANOVA '70>, 도날드 서덜랜드가 주연한 1976년작 <CASANOVA>등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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