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장일치로 결정된 제 51회 깐느영화제 그랑프리! 20세기 마지막 거장에게 바친 깐느의 기립박수!
<율리시즈의 시선>으로 제 48회 깐느영화제를 찾았던 앙겔로풀로스는 에밀 쿠스트리챠의 영화 <언더그라운드>에게 아깝게 황금종려상을 빼앗기고 심사위원 대상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로부터 3년 뒤, 그가 다시 깐느의 초대에 응했을 때 <영원과 하루>는 채 편집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영화제가 개막한 이후에도 계속 믹싱작업 중이었던 이 최고의 기대작은 결국 심사위원 전원의 만장일치로 그랑프리,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30여년을 줄기차게 자신만의 독특한 영상언어로 영화를 예술의 차원으로까지 승화시킨 시네아스트에게 바치는 세계 영화인의 찬사와 경배였으며, 20세기 마지막 거장의 존재를 세계영화사에 알린 기념비적인 사건! 이 영예로운 순간의 주인공인 된 앙겔로풀로스의 11번째 영화 <영원과 하루>는 스스로 영화인생을 돌아본 자화상 같은 작품이기에 이 수상이 더욱 뜻깊다고 할 수 있다.
죽음 앞에서 생의 의미를 깨닫는 시인의 초상 앙겔로풀로스 자신의 자화상같은 영화
죽음을 앞둔 시인 알렉산더. 그가 당장 가야할 곳은 병원이지만 평생을 매달려온 미완성 시를 마무리 짓기 위해 흩어져 버린 말을 찾아나선다. 정작 그 길에서 발견한 것은 어떤 시어보다도 강렬하게 그를 사로잡는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아내와의 행복한 기억! 딸아이의 생일파티로 떠들썩했던 바닷가 집에서의 하루는 아내가 남긴 편지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알렉산더는 그 소중한 순간을 무심히 흘려보냈던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알렉산더는, 평생을 영화에 매달려 온 거장 앙겔로풀로스가 노년에 접어들어 죽음을 생각하고 생의 의미를 짚어보기 시작하면서 그려낸 자화상이며, 그 가운데 깨달은 진리-영화를 통해 삶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영화가 구원받아야 한다는 깨달음-를 보여주는 그의 페르소나이다. 실제로 앙겔로풀로스는 촬영도중 너무나 감정이입을 한 나머지, 촬영 2주만에 잠시 메가폰을 접어두어야만 했다고... 그만큼 <영원과 하루>는 감독의 애정이 묻어나는 작품이며, 평론가와 언론들은 일제히 <영원과 하루>를 그의 최고작으로 꼽았다.
삶의 참된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영화 <영원과 하루> 아름다운 그리스 시어가 들려주는 영원한 삶의 비밀!
<영원과 하루>는 삶에 대한 예리한 철학적 성찰이 아름다운 그리스의 시어들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는 놀라운 영화다. 특히 알렉산더가 알바니아 소년과 주고받는 아름다운 세 개의 그리스 시어들(코폴라, 세니띠스, 아르가디니)은 알렉산더가 처한 삶의 위기와 고통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누구나 한번쯤 살다보면 마주치게 될 삶의 의문들에 대한 앙겔로풀로스의 대답이며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미명 하에 예술의 그림자를 좇다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쳐버린 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 하나. 사랑에 대한 깨달음! 왜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몰랐을까? 코폴라 ; 작은 꽃, 엄마의 품에 안긴 아기의 감정 상태 소년이 알렉산더에게 들려주는 첫 번째 단어 ‘코폴라’는 사랑에 대한 말이다. 생의 가장 크고 위대한 진실은 사랑 속에서 나오는 것임을 잊고 살았던 알렉산더의 뒤늦은 후회와 죽어가는 그를 위로하는 알바니아 소년과의 관계도 이 단어에 투영되어 있다. 어쩌면 인간 삶의 진실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코폴라가 되어주는 것. 안나는 알렉산더의 ‘코폴라’였고 알렉산더는 알바니아 소년의 ‘코폴라’가 된다. 작지만 소중한, 보이지 않지만 위대한 사랑의 존재, 그것이 우리가 영원으로 가는 첫 번째 비밀의 열쇠다!
둘. 존재에 대한 깨달음! 왜 우리는 항상 이방인처럼 느끼는 걸까? 세니띠스 ; 언제 어디에서나 스스로를 이방인, 떠도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 ‘세니띠스’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말이다. 생명의 위협을 피해 고향을 떠난 소년과 자기의 언어를 찾지 못했다며죽음을 앞둔 순간까지 헤매이는 알렉산더의 존재가 이 말 안에 요약되어 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고 이 땅은 우리가 영원히 거주할 곳이 아니라 잠시 머물렀다 가는 곳일 뿐이다. 이 깨달음은 유한한 삶을 받아들이고 영원의 문을 열어줄 것이다.
셋. 시간의 깨달음! 왜 우리는 항상 지난 뒤에서야 깨닫는걸까? 아르가디니 ; 밤이 너무 늦었다. 인간의 황혼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말 소년이 떠나기 전 알렉산더에게 마지막 남기는 말, 아르가디니는 시간에 대한 말이다. 멋진 싯구보다도 사랑하는 아내와 보낸 행복한 하루를 영원히 기억하게 된다는 깨달음. 알렉산더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아내를 잃은 후다. 언제나 그가 돌아봐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아내. 그녀의 사랑을 뒤늦게 알아본 알렉산더는 회한에 젖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되돌리기에 너무 늦었다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사물은 불멸의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 삶과의 이별을 앞두고 알렉산더가 너무 늦었다라고 깨닫는 순간 생의 소중함이 영원한 가치로 승화되는 것!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쁠랑 쎼깡스! 자신의 영화철학을 특별한 형식으로 전달하는 거장!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트래킹 쇼트와 유장한 쁠랑 세깡스는 자연적인 시간에 대한 존중, 사멸된 시간의 복권, 관객에게 성찰적인 시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그의 영화철학의 정수인 동시에 영화미학의 정수로 꼽혀왔다. 촬영감독 요르고스 아르바니티스의 끊임없이 이동하는 트래킹 쇼트는 공간을 가로지르는 자유로운 카메라 무브먼트로, 몽타쥬가 다 담아내지 못하는 분위기까지 전달한다. 앙겔로풀로스가 중요하게 여기는 풍경과 분위기, 인물 간의 정서적 흐름을 단절감 없이 전달하는데 매우 적절한 방법이다. <영원과 하루>는 쁠랑 세깡스를 백분 활용하여 과거는 현재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항상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심지어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다는 독특한 시간철학까지 담아낸다. 카메라는 천천히, 그러나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며 현재와 과거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마치 시간을 ‘우리가 가지고 노는 조약돌’처럼 다루면서! 이러한 카메라 기법은 단 하루일지라도 행복한 기억은 과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현실에서 되살아나고 미래에도 영원히 우리와 함께한다는 알렉산더의 깨달음을 영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앙겔로풀로스 독특한 영상언어 총집합! 그리고 주목할만한 변화, 안개 걷힌 풍경!
검은 옷의 노인들, 노란색 우비를 입은 사람들, 세 명의 친구, 안개 낀 바다, 스산한 겨울, 순수와 희망을 상징하는 어린아이, 장례식과 결혼식 장면 등은 앙겔로풀로스의 각인 같은 기호들로 <영원과 하루>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특히 풍경의 색과 형태를 통해서 인간 내면의 심리를 표현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앙겔로풀로스는 <영원과 하루>에서도 과거와 현재의 공간을 다른 풍경으로 그려 각 시공간에서 주인공 알렉산더의 내면의 심리와 변화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어둡고 무겁고 음침한, 소음으로 가득한 회색빛의 도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 생의 무상함 속에서 깊은 절망과 슬픔에 빠져있는 알렉산더의 내면 풍경을 투사하는 반면, 따사로운 햇살, 여름, 하얀 백사장, 시원한 바닷소리, 흰 옷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웃음소리는 사랑으로 충만한 과거의 행복한 시간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했다. 특이한 것은 이 과거 장면의 풍경이 그의 영화에서 유례없을 정도로 밝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와 불안정성을 상징하는 아이콘인 안개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은 주목할만한 변화다. 선명한 풍경의 대비로 우리는 현재 그가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지, 과거 그는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말로 하지 않아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게 된다.
감동을 조율하는 매혹적인 음악과 효과적인 사운드의 사용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랫동안 앙겔로풀로스와 함께 작업해온 엘레니 카라인드루는 <영원과 하루>에서도 비감에 휩싸인 노시인과 발칸반도의 비극을 감싸안는 매혹적인 음악을 들려준다. 시나리오보다 카메라 움직임에서 음악적 영감을 얻는다는 그녀는 <영원과 하루>에서도 화면과 환상적인 결합을 이룬 음악을 선보였다. 특히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등 목관악기가 주조를 이룬 이 영화의 메인테마는 애잔하면서도 한 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강렬한 멜로디로 관객을 사로잡을 것이다. 사운드 정보에도 귀를 기울이면 더욱 풍성한 감동을 받을 수 있다. 거리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와 경보음은 도시생활의 피곤함을, 19세기 그리스 어촌 장면에서 들리는 온갖 새의 울음소리는 자연의 정취를 소리를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쇼트가 바뀔 때 사운드가 한 박자 먼저 등장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특히 알렉산더가 현실에서 과거로 미끄러져갈 때는 사운드가 먼저 등장하여 유혹하듯 그를 과거로 인도하고 있다.
은유와 상징을 통해 전달되는 역사의식
<영원과 하루>는 기존에 앙겔로풀로스가 보여주던 과격한 좌파적 주장이 자리를 감추고 한결 부드럽고 로맨틱한 드라마가 두드러진 작품이기 때문에, 그의 역사인식이 퇴색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은유와 상징을 통해 세련되고 완곡하게 자신의 역사철학을 전달하고 있다. 알렉산더가 들려주는 19세기 시인 솔로모스의 일화는 그리스 독립전쟁의 정신을 되살리려는 노력이자, 그리스 문화, 그리스의 언어에 대한 투철한 자기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 말을 찾지 못해 헤메이는 시인의 설정도, 그런 그에게 철학적 해답을 주는 것이 고대 그리스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세상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영화를 찍는다고 믿는 이 거장의 날카로운 현실인식은 영화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알렉산더와 소년이 다다른 국경의 섬뜩한 풍경과 두 사람이 마지막 버스여행에서 경험하게 되는 이색적인 시간은 그의 주제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국경의 철조망, 그곳에 감전사한 채로 매달려 있는 아이들을 비추는 장면은 강렬한 충격을 던지며 직간접적으로 그리스, 알바니아 양국의 피의 역사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앙겔로풀로스가 바라보는 현실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알렉산더와 소년이 탄 버스에서 만난 잠만 자는 혁명군의 모습은 ‘역사는 죽지 않는다. 단지 낮잠을 잘 뿐이다’라는 앙겔로풀로스의 생각을 문자 그대로 형상화하고 있으며 혁명군에 이어 버스에 올라탄 현악 삼중주는 갈등을 뛰어넘는 공존과 화해의 제스추어로 제시되고 있다. 알렉산더가 그렇게 찾아 헤메이던 시인 솔로모스가 버스에 남기고 내리는 메시지는 더욱 인상적이다. “인생은 아름다워!” <영원과 하루>에는 눈물의 시대였던 20세기를 넘어 새 시대를 맞이하기를 원하는 감독의 희망이 담겨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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