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5월 6일 위스콘신주 케노샤에서 태어난 오손 웰즈는 1985년 10월9일 사망했다. 연극배우로 활동했던 웰즈는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존 휴즈먼과 함께 일했다. 좌익성향의 공연을 올리려하다가 정부의 방해를 받아 다른 극장으로 옮겨 공연을 한 경험도 있다. 이 사건으로 휴즈먼과 웰즈는 극단에서 해고되어 머큐리극단을 설립하게 된다. 형식상으로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고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웰즈는 실험적인 극을 만들어나갔다. 라디오로 활동영역을 확장하면서도 보다 사실에 가까운 방식을 이용하여 기존의 라디오쇼와는 차원이 다른 작품을 만들어내었다. 1938년에 방송된 "세계전쟁"은 사람들이 뉴저지에 실제로 화성인이 침략했다고 믿게 만들어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1939년 RKO는 웰즈를 고용하여 새로운 소동을 일으키길 바랬다. 웰즈는 머큐리극단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계약에 응하고 <시민 케인>(1941)을 연출했다. 이 작품은 주제나 스타일면에서 자유로운 창작권을 행사한 작품이었다. 서로 다른 인물들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 점이나 딥포커스와 치밀한 미장센으로 고전적인 헐리우드 영화의 형식을 깨트렸다. 하지만 이 영화의 실제 인물인 신문계의 거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매우 화가 나서 제작, 상영, 배급을 방해했고, 그가 가진 신문들을 동원하여 악평을 퍼부었다. <시민 케인>은 실패로 돌아갔고 웰즈는 다음 영화 <위대한 앰버슨가>(1942)는 조심스럽게 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촬영을 마친 웰즈가 다큐멘터리 <그건 모두 사실이야>의 촬영을 위해 남미로 떠난 사이 RKO는 140분짜리 버전을 88분으로 만들어버리고 결말도 해피엔딩으로 바꾸하고 지시한다. 흥행과 비평에서 다시 쓴 맛을 본 웰즈와 머큐리극단 관계자들은 모두 RKO를 떠난다. 이후 웰즈는 헐리우드에서 <공포로의 여행>(1946), <스트레인저>(1946)의 연출에 부분적으로 참여하다가 <상하이에서 온 여인>(1948)을 만든다. 이 작품에서 웰즈는 사이가 별로 안 좋은 상태였지만 그의 아내인 배우 리타 헤이워드를 기용한다. 촬영내내 시나리오는 반복되고 편집도 여러 차레에 걸친 후 어렵게 완성하지만 흥행에 실패는 물론 웰즈는 아내와 이혼까지 하고 만다. 하지만 사이가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리타 헤이워드의 연기력을 잘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시기 웰즈의 마지막 헐리우드 영화는 <맥베스>(1948)이다. 헐리우드에 환멸을 느낀 웰즈는 유럽으로 건너가 다른 감독들의 작품에 출연하면서 <오셀로>(1952), <아카딘씨>(1955)를 만들었다. 50년대 후반 다시 헐리우드를 찾은 웰즈는 약 8분여에 이르는 첫 씬의 롱테이크로 유명한 <악의 손길>(1958)을 만든다. 이후 그는 다른 감독들이 연출하는 작품에 배우로 간간이 출연하며 지냈다. 천재 감독 웰즈는 헐리우드 시스템속에서 재능을 소진시켜버린 불우한 사람이다. 그가 만든 위대한 작품들은 그 당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으며 스튜디오의 간섭으로 영화는 처참하게 잘려나가야 했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강한 자의식을 가진 인물이다. 그들은 곧잘 법과 제도에 의해 상처받는 것으로 그려진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