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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로맨스의 박찬욱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kharismania 2006-12-03 오후 10:37:11 29102   [38]
과연 여긴 어디일까. 복수 삼부작의 다음은 정신병원의 로맨스? 박찬욱 감독의 러브 스토리? 이곳은 그 공간만큼이나 의미가 모호하다. 과연 어느 곳에 방점을 찍어야 할까. 마치 관객의 정신분열을 도모하는 이 영화는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을 아기자기하게 풀어낸다. 팝콘이나 씹으며 부담없이 접근하기에 이 영화는 살짝 난감한 기운이 여실하다.

 

 사실 박찬욱 감독이 자신의 이름을 알린건 '공동경비구역 JSA'의 흥행덕분이지만 그가 자신의 영화를 알린 건 '올드보이'의 수상부터였다. 물론 그의 세계관이 확립된 건 '복수는 나의 것'이지만 작품성과 무관하게 그의 네임밸류에 인지도를 따라붙이는 것에 실패했다는 점에서 '올드보이'는 그의 영화인생에 큰 전환점이 된다. '친절한 금자씨'가 흥행이라는 단어와 질적으로 다른 자리에 위치했음에도 어느 정도 흥행을 끌어냈음은 '올드보이'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것 역시 칸 영화제가 그에게 선사한 것이 비단 트로피의 명예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그는 누구의 의지로 명명된 것인지 모르지만 그는 복수3부작을 마쳤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랑이다. 그런데 그 사랑이 펼쳐지는 곳은 정신병원이다. 그것도 자신이 사이보그라고 믿는 여자가 그 로맨스의 한축에 자리한다. 대체 이 영화는 어느 공간에 서있는 것일까. 뭐가 괜찮다는 것인가.

 

 복수3부작의 마무리는 용서 혹은 구원이었다. 백색의 눈안에서 정화의 기운을 누리는 금자의 모습은 분명 동진이나 오대수의 끝과는 달랐다. 그가 택한 복수의 끝자락은 처절한 폭력이 끝없이 계승되는 뫼비우스의 굴레가 아닌 그 굴레를 덮는 구원의 순백색 눈송이였다. 이번 영화는 로맨스의 탈을 쓰고 있지만 -물론 이야기의 정점에 서있는 것 역시 로맨스지만- 여전히 그는 복수를 이야기한다. 다만 그 복수는 실행이 아닌 상상안에서만 꿈틀댄다. 그리고 그 복수를 향한 감정이 남기는 것은 동정심(symphathy). 그 동정심은 타인을 향한 것도 아닌 자신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다. 그 연민이 막지 못했던 복수. 이번에는 그 동정심이 복수를 막는다. 그리고 복수의 자락에서 발견되는 것은 자기위안적 치유의 갈망이다.

 

 물론 이 영화의 축은 로맨스다. 그 로맨스에 집중하고 영화를 본다해도 큰 무리는 없다. -어쩌면 그것이 영화를 더욱 즐겁고 상큼하게 볼 수 있는 방점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극중 영군(임수정 역)과 일순(정지훈 역)의 사랑을 통해 튕겨져나오는 다른 질감의 꺼리들을 외면하기에는 껄끄러운 속내가 너무나도 선명해보인다.

 

 그들이 있는 곳은 정신병원이다. 그곳에 정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 즉 극중 영군이 하얀맨-그들이 입은 흰가운색 때문에-이라고 부르는 그들 뿐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환자다. 그 경계를나누는 것은 관객이지 영화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정상과 비정상의 간극을. 정신병원안에 가득차있는 정신병자들의 모습은 지극히 당연해보인다. 왜냐하면 그곳은 정신병원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곳이 그 외부환경이었다면 그들은 너무나도 이상해보였을 테지만 그들은 그 안에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들의 자리가 마련되는 공간. 오히려 외부의 정상인들이 비정상인이 되는 공간. 어쩌면 그 아이러니한 공간의 설정자체가 이 영화의 아이러니한 방점을 상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영화에서 보여지는 소통의 방식은 또다른 방점이다. 자신을 싸이보그라고 믿으며 식사를 거부하는 영군에게 하얀맨들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든 그에게 음식물을 투여하려고 한다. 사실 그들은 영군이 자신이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영군이 먹는 행위가 아닌 먹이는 행위다. 일단 행위의 본질보다는 행위의 결과를 취하려고 하는 것이 정상인들의 치료행위다. 하지만 같은 지점에 서 있는 일순은 조금 다르다. 그는 영군에게 밥을 먹이기 위한 지점을 관찰을 통해 파악한다. 그가 발견한것은 싸이보그라는 믿음을 해치지 않는 범위내에서 그녀에게 식사라는 행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 어떤 것보다도 먹는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일순은 그 진실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눈높이를 보여준다.

 

 치유는 이영화의 중요한 모티브다. 영군과 일순은 각자 자신만의 페이소스에 점령당한채 살아가는 인간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상처로부터 확장된 정신이상증세를 안고 산다. 이는 박찬욱 감독의 페르소나들이 내면에 지니고 있던 비이상적 기질을 노골적이고 솔직하게 까발린 모양새다. 그로써 박찬욱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박찬욱스러운 이야기를 한다. 그의 페르소나들이 그 내면적 생채기를 폭력으로 점철된 복수의 형태로 표출해냈던 것과 달리 신세계 정신병원의 뉴페이스들은 생채기의 흔적이 내면이 아닌 외면으로 튕겨져나와 행위적 구현으로, 즉 자신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타인에게 인지하게 만든다. 이는 전작들에서 자신의 내면에 증오를 감춰두고 복수를 계획하던 인물들의 이중적 착란 기질의 은폐와는 다른 구도다. 일순과 영군을 비롯한 정신병동의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외면적으로 드러내보인다. 그 공간에 자리한 이들은 하나같이 비정상이지만 그들을 비정상으로 만든건 그들의 내면에 달라붙어있는 과거형의 경험에서 기인한 상처들이다. 결국 그들이 외적으로 자신의 비정상 행위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은 상처에 대한 치유적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몸에 이상이 생기면 열이 나는 것처럼. 그것은 결국 자신을 비정상으로 이끈 세상에 대한 응징적 복수보다는 자신의 상태에 구원을 부여할 치유를 갈구하는 방법론이다.

 

 그 방법론에서 키워드는 일순이다. 그는 타인의 것을 훔친다. 하지만 그가 훔치는 것은 특별하다. 그는 탁구를 훔치기도 하고 죄책감을 훔쳐가기도 한다. 그 행위는 간단하다. 넓은 흰종이에 상대방의 얼굴을 찍어내고 손바닥으로 전달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 말도 안되는 행위는 실제로 변화를 준다. 이는 그들이 비정상이기 이전에 믿음을 행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위한 믿음. 그렇다면 그 믿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치유에 대한 욕구이며 구원에 대한 갈망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비정상이라고 인지하고 있지 않지만 비정상이라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그 동의에 대한 근거는 일순에게 '훔치심'-일순이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정의하자면-을 당하는 모습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비정상이라는 믿음에 근거한채 살아가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으로 일순과 손을 마주친 것만으로 자신들이 훔침을 당했다고 믿는 것이다. 여기서 일순이 훔치심을 행하는 행위는 중요하다. 이는 동류의 아픔을 겪은 이들이 서로에 대한 이해심으로 각자를 사유하는 행위이기 떄문이다. 그리고 그 훔치심을 행하는 일순 역시 비슷한 사람이다. 그 역시 누군가로부터 치유받아야 하는 인물이지만 그는 그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성의 결핍으로 인한 탐식적 도벽. 이 역시 그의 결핍이 부른 상처에서 기인된 이 이상한 행위는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들에게 하나의 플라시보 효과와도 같다. 비정상적 행위를 위한 정상적 소통. 애정의 자리를 충만하기 위해 타인의 무언가를 훔쳐내는 일순의 행위는 그로부터 관심을 얻고자 하는 유아적 발상의 뚜렷한 표현이다.

 

 두번째 방점은 일순과 영군의 교감이다. 일단 이 축은 로맨스적 감수성이 끼어들지만 이 영화는 로맨스에 대한 어떤 근거도 없고 감정이 흐르는 추이도 없이 성립되어버린다. 단지 그 표면에 흐르는 진행적인 분위기가 방향성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일단 영화에서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도 들을 수가 없다.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로맨스라니. 이는 이 영화의 독특함을 이해한다는 것만으로는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조차 평범하지 않은 정신병원에서 그들에게 평범한 사랑을 부여하고 그 안에서 눈물이라도 흘리게 만든다면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이영화를 이상하게 만드는 요건이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데카당스같은 이야기의 세계안에서 평정심으로 작용하는 감정의 비정상적 소통은 이 영화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어버린다. 무엇보다도 그 그로테스크한 환경을 원색의 느낌으로 디자인한 미장센의 아기자기함만큼이나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위들이 귀엽게 느껴지는 것은 그 이상한 나라의 그들이 비정상과 정상이라는 이성적 분기점과는 무관하게 비악의적이기 때문이다. 비악의적인 순수함은 비정상과는 무관한 영역이고 이 영화의 난감한 기질앞에 웃음을 띨 수 있게 만드는 보편성이다. 또한 어떤 사랑의 클리셰들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이 영화의 로맨스가 관객에게 이해되어짐으로 귀결되는 것 역시 그 정서적인 단순성에 있다.

 

 여전히 박찬욱의 영화는 복수를 이야기한다. 영군은 하얀맨들이 할머니에게 틀니를 전달하는 것을 막는다고 믿으며 그들에게 항상 무차별 총질을 한다. 하지만 그녀의 복수는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이상하게 아무리 충전해도 힘이 나질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닌 기계들과 소통하는 -물론 이는 정신병적인 기질로 인한 것이지만- 그녀는 싸이보그라면 행해서는 안된다는 칠거지악-동정심, 슬픔, 설레임, 망설임, 공상, 죄책감, 감사함-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이 싸이보그라는 믿음안에서 그녀는 인간적인 감정을 결핍시켜야만 한다고 믿지만 믿음과 무관하게 생성되는 칠거지악의 감정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특히나 복수를 위해서는 버려야하는 동정심(sympathy)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일순에게 동정심을 훔쳐가줄 것을 요구하고 일순이 동정심을 훔쳐간 후 그녀는 하얀맨들에게 무차별 난사를 가한다. 하지만 동정심이 사라진 뒤로 자신의 복수의지가 다져졌다고 믿지만 여전히 그녀는 복수를 행할 수가 없다. 자신의 분열증이 낳은 싸이보그라는 환상안에서 그녀는 맴돌고 식사대신 건전지 충전을 꾀하는 그녀는 점점 쇠약해질 뿐이다. 그녀를 망상에서 구출하진 못하지만 그 망상안에서 어느 정도 해방을 누리게 하는 것은 일순이다. 그는 그녀가 스스로 금기처럼 여기는 칠거지악을 외면할 뿐 완벽하게 배제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비인간이라고 믿는 인간이 자신의 인간적 감정을 배제하지 못하는 면모로부터 인간으로써 비인간적 행위를 거침없이 행하는 이들에 대한 고찰이 끌어내진다. -물론 이 영화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할 법하지만- 이는 영화의 메세지 전달이 아닌 캐릭터를 세우는 박찬욱의 세계관에 대한 각성이다. 안티소셜 증후군, 작화증, 분열증 등의 증상이 난무하는 정신병원안에 그의 영화가 들어선것은 어쩌면 그의 이야기가 펼쳐져야 할 가장 이상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정상적인 질환적 캐릭터로써 사회적인 상식보다는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을 응집시키던 그의 영화는 마치 외전과도 같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마음껏 자신의 세계관을 표출한다. 비성숙, 혹은 미숙한 세계. 그것은 우리가 보는 이 세계의 완성안에 꿈틀대는 유아적 기질이며 박찬욱이 고집하는 세상에 대한 뒤틀린 시각이다. 이 영화는 그런 시각을 좀 더 아기자기하게 드러낸다. 정신병원은 사회라는 하나의 체계안에서 액자와도 같은 이질적인 공간이다. 비사회적인 인물들이 수용되는 공간. 그 공간은 독자적인 사회를 형성한다. 그안에서 벌어지는 간극. 그것만으로도 사회적 통념따윈 부서도 상관없고 인간적인 이성따위는 필요없는 시간이 마련된다.

 

 로맨스의 탈을 쓰고 있지만 이 영화는 박찬욱 감독의 난해한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물론 그 지독하게 난해한 상상력이 지적인 한계를 자극한다면 이 영화는 표면적인 단순함을 누리고자 했던 관객에게 모독과도 같은 실험으로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사랑하는 태도는 지긋지긋한 로맨스의 공식안에 지친 이들에게 주목할만한 가설이 된다. 상대방에 대한 변화가 아닌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 이해로 맺어지는 로맨스는 타인의 세계를 허물지 않고 유지하고 보존하는 개인과 개인의 존립이라는 확대해석이 가능하다. 복수심에 불타며 치유를 갈망하는 박찬욱 감독의 세계관은 여전히 확고하다. 그의 세계관안에 들어선 로맨스는 이질적이지만 무언가를 말하고 싶게 하는 매력을 지녔다. 끈적끈적하게 세상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것만 같던 전작들에 비하면 매끈해졌지만 상상력의 난해함은 더욱 깊어졌다. 물론 이영화는 그의 행보에서 튕겨져나온 돌과 같다. 하지만 그 부록같은 상상력을 부담없이 즐기기에는 이 영화는 만만치 않아보인다. 비와 임수정이라는 상큼한 빛깔에 이끌려 한입 배어물었다가 그 이질적인 맛에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그리고 즐겁게 마저 씹어삼키던지 화를 이기지 못하고 내던져버리던지는 관객의 몫이다. 로맨스조차도 박찬욱감독을 결코 친절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이 영화가 증명하는 것만 같다. 물론 그가 치유를 꾀하고 있지만 완치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 일순과 영군은 서로 의지하는 법을 통해 치유에 접근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세상에서 비정상인이라는 것. 결국 그것은 풀어내지 못한 복수의 담합에 대한 여운적 진행에 대한 사유가 아닐까. 그는 여전히 복수의 완성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wrttten by kharismania-


(총 0명 참여)
gaiia
대단하시네요   
2007-01-03 05:54
iamjo
이글을 읽으니깐 영화가 더 이해가 되내요   
2006-12-25 09:42
qwerter
민군 너무 글 잘쓰는거 아냐?? 넘 부러버   
2006-12-18 16:22
spookymallow
이 분의 글을 보며.. 제 글을 다시금 보게 되죠..;; 전 아직.. 영화의 눈이 부족한듯 합니다;;;   
2006-12-16 13:15
makewith
이분글 다음이랑 네이버에도 쫙 있는데 읽을때마다 흠~ 잘쓰시는듯!!   
2006-12-15 13:14
yulen23
엄청 길게도 쓰셨다 우와 대단 ...

싸이보그 완전 보고싶다는   
2006-12-12 21:27
isquare
영화를 되새김하게 되는 글입니다.^^   
2006-12-09 14:3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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