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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마태복음
andrew1130 2008-01-01 오전 4:02:03 1353   [3]
 

<마태복음>은 복음의 내용 그대로 예수의 일생을 따라간 영화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는 마태복음의 엄청난 분량을 2시간이라는 러닝타임 내에서 소화해내기 위해 어떤 방법을 취했는가? 이다. 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 중 중요한 의미를 띠는 장면들은 영화에서 하나의 시퀀스로 기능한다. 33년이라는 파란만장한 세월을 2시간 만에 담아내기 위해 한 장면(scene)이 하나의 시퀀스가 된 것이다. 이렇듯 거대한 스토리를 어떻게 2시간의 플롯으로 압축해 보여주는지가 영화를 구상하는 데 있어 커다란 난간이었을 것이다. 파졸리니는 2가지의 방법을 사용한다. 첫째는 앞에서 언급했듯, 중요한 사건들은 하나의 장면에서 기승전결이 있는 하나의 시퀀스로 묘사함으로써, 디테일을 살리고, 예수의 행적 중에 늘 반복되는 제자와 대중에게 하는 말씀의 전파 즉 설교는 연속되는 컷으로 시간을 점프시켜 시간을 크게 압축한다. 즉 예수의 인생에서 전환점이라 할 수 있고 시나리오 상에서는 플롯 포인트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건들을 골라내 부각을 시키고, 계속되는 말씀의 장면은 일련의 흐름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몽타주 시퀀스처럼 보여준다. 영화 초반 예수가 제자와 사람들에게 하는 말씀들은 페이드를 통한 전환으로  배경의 시공간은 바꾸되 클로즈업의 예수를 컷의 연속으로 보여주고, 영화 후반 예루살렘에서의 군중에게 하는 말씀 장면에서는 군중 속에서 말씀을 전파하는 예수의 모습을 연속되는 컷으로 보여준다. 디테일을 살려야할 부분은 풍경과 정황을 담아 살리고, 간략화 시켜도 되는 부분은 말씀의 사운드를 통해서 진행되는 방식이다. 광야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클로즈업 숏의 연속은 성서에서 보면 40일이라는 시간이다. 그동안 이들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리고 40일이 지나 사람들을 만난 안식일에 음식을 먹는다. 그만큼 이들은 예수의 말씀만을 듣고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빵을 먹고서가 아니라 말씀을 먹고서 산다는 이야기가 실천된 순간이다. 그래서 시간과 배경, 날씨가 바뀌는 가운데 예수가 설교하는 숏이 여러 차례 연속된 것은 이러한 40일간의 설교에 빠진 이들의 상황을 가장 극명히 표현하고 그 시간을 압축할 수 있는 방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숏의 연결을 통한 시간의 점프이다. 이 영화는 유독 정면 숏이 많고, 따라서 180도를 오가는 시점 숏이 많다. 인물들이 컷을 통해 서로 시선을 오가는 동안 시간은 점프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 시작에서 마리아의 얼굴이 보이고 다음에 요셉의 얼굴이 보이고 다시 마리아의 얼굴이 보이고 마리아가 밑을 내려다보면, 다시 요셉이 심상찮게 쳐다본다. 그 후 카메라는 사이즈를 달리해서 풀 숏으로 배가 부른 마리아의 전신을 보여주면 다음에 요셉 또한 풀 숏으로 잡히며 걸어가는 숏으로 이어진다. 풀 숏으로 빠진 순간 마리아가 아기를 뱄다는 사실에 충격을 먹은 요셉의 행동임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통상 요셉을 비췄을 때, 요셉이 서있는 데서 시작해 움직임을 갖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서있는 행위를 생략하고, 바로 걸어 나가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다음 컷을 보자. 카메라는 좀 더 빠져서 롱 숏으로 마리아와 그 뒤에 있는 집을 보여준다. 마리아는 집 입구에서 몇 걸음 걸어 나온다. 그 다음 숏이 멀리 길을 걸어가는 요셉의 뒷모습이다. 실제의 시간이라면 요셉은 그 거리까지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요셉이 걸어가는 뒷모습은 마리아의 시선이고 마리아가 걸어 나오는 몇 초의 시간동안 화면 프레임에 잡힌 만큼 멀리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화면에 잡힌 요셉의 마리아와의 거리감은 실제 생각해볼 때 멀어 보인다. 비교적 카메라의 가까운 곳에서 걸어가 멀어지는 것이 시간의 느낌상 맞을 텐데, 가까운 곳에서 걸어가기 시작하기를 생략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컷이 연속되면서 시간이 조금씩 점프한 것이다. 다시 다음 화면은 마리아의 클로즈업이다. 다음 화면은 여전히 멀어지는 요셉의 화면인데, 특이한 것은 카메라가 마리아를 가까이에서 잡은 것처럼, 다음 요셉의 숏도 전전 화면보다 더 가까이 요셉에게 다가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음 화면은 마리아의 얼굴로 카메라가 더 근접하고, 그 다음 화면에서는 시간이 점프해 다음 장면에 어느 마을에 도달한 요셉의 뒤통수를 클로즈업에서부터 보여준다. 마리아가 멀어지는 요셉을 바라보는 시점 숏의 반복 속에서 마리아의 숏과 요셉의 숏 사이즈가 어느 정도 비슷하게 나아가고 있다. 엄밀히 말해 마지막 마리아의 시점 숏은 그 대상이 되는 요셉이 마리아와 물리적으로 거리가 먼 장소에 도달해있기 때문에,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숏 사이즈를 비슷하게 함으로써 둘 사이에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는 심리적 연결의 끈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마치 거리는 멀어도 마리아가 요셉을 쳐다보고 갈망하는 듯 하다. 마음(꿈)의 시점 숏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숏 사이즈의 연결은 요셉이 천사를 만나 생각을 바꿔먹고 마리아에게로 돌아가는 다음 장면의 복선이면서, 그 장면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기능을 한다. 마음의 시점 숏은 바로 이 다음 장면, 요셉이 천사를 만나는 장면에서도 등장한다. 요셉은 마을을 보고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본다. 요셉의 시점 숏으로 장면이 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셉이 주저앉아 잠을 청하는 숏에서 사운드가 사라지더니 요셉이 깨어나고 그 다음 숏에 천사가 서 있다. 성서를 자세히 읽어보지 않아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요셉은 잠을 잤고 꿈에서 천사를 만났다. 이 부분을 파졸리니는 내면의 POV로 연출한 것이다. 실제 요셉은 깨어난 것이 아니라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깨어나 바라보는 시점 숏은 물리적 시점 숏이 아닌 마음의 시점 숏이다. 이러한 마음의 시점 숏은 천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사용된다. 아기 예수를 만나 경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동방박사의 눈에 천사가 나타나 예수를 죽이려는 헤롯이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을 쳐다보며 아무 말 없이 이들을 이끈다. 이 장면도 성서의 내용에는 동방박사들이 천사의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리아와 그 가족이 예수가 묻힌 동굴을 찾아가는 장면에서도 이들이 고개를 들면 동굴을 막던 돌이 굴러 떨어지고 예수가 없음이 확인된 후 천사가 나타난다. 이렇듯 예수와 관련된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 천사가 나타나고 그는 화면 속에서 실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꿈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내면의 POV라고 보여지는 이상한 숏이 있다. 유다가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바르는 여인을 책망하다가 도리어 예수에게 책망을 듣고 그 자리를 떠나는 숏이다. 그런데 그 다음 숏이 떠나고 없어야 할 유다의 클로즈업이다. 유다는 뭔가 절망한 듯 고개를 떨군다. 예수의 책망을 듣고 자리를 뜨는 숏은 유다의 상상의 시점 숏인 것으로 판단된다. 아니면 실제 유다는 자리를 떠났고, 그 뒤의 숏은 그렇게 떠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유다의 양심을 이미지화환 것일 수도 있다. 이는 아기를 밴 마리아를 떠나는 요셉을 지켜보는 마리아의 심정과 비슷해 보인다. 마음의 시점 숏 외에 첫 장면과 두 번째 장면 간에는 또 하나 공통점이 있다. 장면의 시작이 클로즈업으로 시작해, 풀 사이즈나 롱 사이즈로 빠졌다가 다시 클로즈업으로 마친다는 것이다. 클로즈업이 장면 전환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왜 이런 방식을 택했는지 생각해보면, 첫 장면의 시작과 끝을 마리아의 클로즈업으로 한 것은 마리아의 감정과 상황이 요셉의 행동으로 인해 변했음을 극명히 보여주기 위해 배치시킨 것이고, 두 번째 장면의 처음과 끝을 요셉의 클로즈업으로 한 것은 요셉이 천사를 만나 마음을 고쳐먹는 변화를 극명히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인물 내면의 변화는 다음 장면이 나오도록 밀어주고 거기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요셉의 심경변화는 그가 마리아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도록 한다. 그리고 마리아가 밴 아이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예수라는 기쁜 소식을 안고 집으로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픈 마음의 표현을 다음 장면에서 집으로 향하는 줌 인으로 표현한다. 이 숏도 내면의 욕망을 나타내는 POV로 생각된다. 이런 견해가 맞을는지 모르지만, POV 수업은 영화를 보는 나의 태도를 다르게 한 것 같다. 영화의 시간성으로 다시 돌아가서, 점프와 클로즈업이 중요한 키워드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숏과 숏이 컷으로 전환되면서 시간이 점프하고 장면과 장면도 컷으로 전환되면서 시간이 점프한다. 숏 사이의 점프는 예수가 병든 남자의 얼굴과 불구인 남자의 다리를 고치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는 등의 기적을 행하는 장면에서도 적용된다. 성서에 기록된 기적의 장면을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했었는데, 예수가 말을 하고 쳐다보면 바로 다음 숏에서 기적이 행해진 모습이 펼쳐진 것이다. 이런 즉각적인 기적의 실천은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수 있지만(이 또한 영화라는 테크놀로지가 이루어낸 기적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믿음의 문제인 듯 하다. 믿음이 신실한 사람에게는 이 장면이 진실로 다가올 것이다. 서서히 기적이 일어나기보다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모습이 더욱 예수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는 신뢰감을 준다. 그래서 감독은 이러한 방식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기고 자살하는 장면도 숏 사이의 점프가 있다. 어쨌든 이러한 숏 사이의 점프는 시간의 압축을 가져오는 효과가 있다. 한편 장면 사이의 점프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 영화의 장면을 전개하는 방식은 한 장면에 서론 본론 결론이 있다면 서론과 결론은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형식이다. 예수와 제자들이 어느 지역에서 어느 지역으로 이동하는 모습은 생략하고 지역에 도착해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 장면을 시작하고, 이 장면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알맹이가 제시되면 여차 없이 컷을 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방식이다. 음악이 나오고 감정 선을 어느 정도 끌어올려주기 위해 장면을 지속시킬 법도 한데, 가차 없이 끊는다. 이런 본론을 제시하는 숏 운영 방식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클로즈업이다. 인물들의 얼굴을 잡은 클로즈업은 이들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변화를 보여줌으로써, 지금의 상황과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상케 함으로써 그 장면에서 이루어져야 할 의미 전달을 담당한다. 즉 클로즈업에서 의미전달이 됐다면 더 이상 장면을 지속시킬 필요 없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헤롯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시작된 장면이 헤롯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마무리되는 장면에서 헤롯의 얼굴 클로즈업이 풍기는 뉘앙스가 변했기 때문에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인물들의 얼굴 클로즈업의 기능하는 의미전달에 대해 생각해보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자유간접화법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굳이 대사를 하지 않더라도 인물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고정된 뉘앙스, 도상학(iconography)에서 그 사람의 캐릭터와 정서가 표현되는 것이다. 표정변화만으로 그 인물의 상태가 어떠한지 표현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의미전달은 이러한 자유간접화법에 기대고 있는 만큼 클로즈업의 지속적인 사용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한 장면에서 인물들의 심리와 그들의 변화, 그리고 장면과 장면을 넘어가게 하는 단초로서 작용한다. <살인의 추억>에 대해 봉준호 감독이 얼굴의 퍼레이드라고 했는데, 얼굴에 집착한 정도와 그 미학적 의도로 봐서는 <마태복음>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주로 예수의 클로즈업이 주로 등장하는 가운데, 예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예수가 설교를 하는 동안 제자들과 마을에 사는 유대인들, 바리새이파, 율법학자, 제사장의 클로즈업도 지속적으로 비쳐진다. 아기예수를 죽이기 위해 마을을 습격하는 군인들의 얼굴들로 클로즈업으로 비쳐진다. 위의 이유 외에 클로즈업이 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인가? 예수의 일생을 그린 마태복음에서 파졸리니가 중요시 한 것은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얼굴들이 응시하는 그 무언가. 예수가 응시한 대상은 제자와 대중이고, 제자와 대중이 응시한 대상은 예수이다. 즉 인물들의 클로즈업은 POV라 할 수 있다. 설교하는 예수의 클로즈업에서 대중의 얼굴 하나하나로 컷되면 이는 예수의 시점 숏이라 할 수 있고, 대중의 얼굴에서 다시 예수의 얼굴로 컷되면 이는 대중의 시점 숏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시점 숏이 클로즈업을 통해 오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클로즈업의 연결을 통한 시점 숏이 실제와는 거리가 있다.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을 좀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는 그 대상이 미디엄 숏이나 풀 숏으로 비쳐지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클로즈업을 사용한 것은 앞에 언급한 이유들과 함께 예수가 바라보는 대중과 대중이 바라보는 예수의 심리적 거리가 밀접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감히 추측해본다. 영화의 후반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대중에게 설교를 할 때는, 예수와 대중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기보다는 카메라가 멀리서 위치해 군중 장면으로 이들을 한 데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때 이들의 심리적 거리는 멀어 보인다. 예수의 설교에 대해 군중의 반응은 좋지 않다. 이러한 클로즈업 시점 숏이 이루어내는 의미창출에 있어, 글의 서두에 언급한 영화의 첫 장면은 그 방식이 재밌다. 클로즈업으로 서로 시선을 거두던 마리아와 요셉, 사이즈가 변해 배가 부른 마리아의 전신을 보여주면, 요셉이 마리아를 쳐다본 표정의 의미가 파악되고 앞으로 그의 행동이 예상된다. 클로즈업의 인물의 표정과 함께 화면 사이즈의 변화가 의미를 창출했다고 할 수 있다. 예수가 기적을 행하거나 천사를 만났을 때, 사람들의 반응을 얼굴의 표정이 아닌 다른 것으로 했다면 어땠을까? 파졸리니는 클로즈업에서 의미를 창출했고, 의미의 창출을 위해 클로즈업이라는 화면 사이즈를 찾아낸 것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내용 중에 세상의 영화에는 두 가지 숏이 있고, 그중 하나가 등장인물을 뜻하는 하나의 주체, 다른 하나가 등장인물과 카메라를 의미하는 두개의 주체가 있다고 하셨다. 그 중 두개의 주체가 자유간접화법의 기초라고 하셨는데, 이는 등장인물을 카메라가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느냐에 따라 정서가 달라지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즉 카메라가 싱거운 등장인물에 맛을 첨가하는 경우다. 기차를 탄 한 여자가 창문을 열고 차창 밖의 공기를 들이마십니다. 그건 외로움입니다. 일반적으로 창문을 열고 차창 밖의 공기를 들이마셨다고 해서 그 모습이 외로울 수 있을까? 보통 앞뒤의 정황을 알아야 그 모습이 외로운지 기쁜지, 즐거운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영화에서 카메라로 어떻게 이 모습을 담아내느냐에 따라 정서를 유발할 수 있다. 파졸리니는 클로즈업과 시점 숏 편집의 사용으로 그저 있는 인물의 정서와 의미를 이끌어낸다. 거기다가 인물의 클로즈업을 잡을 때, 망원렌즈를 사용해 배경이 지워지게 함으로써 그들의 얼굴에 집중하게 한다. 이처럼 클로즈업과 시점 숏의 교환이 편집과 아우러져 의미를 창출한다는 점은 이 영화에서 중요한 형식이다. 성서 상에 보면 예수가 어떠한 육체를 지니고 어떤 행동거지를 하는지는 묘사되지 않았다. 그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정신과 말씀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 얼굴 밑의 신체를 배제하고 인물의 얼굴에 집중한 것으로도 생각될 수 있다. 한편, 유물론에 기댄 맑시스트 파졸리니가 관념론에 치우친 기독교 근본주의의 마태복음을 어떻게 영화로 풀어냈는지가 궁금하다. 이는 파졸리니가 자신의 영화의 소재로 예수의 일생을 선택한 이유와 연관이 있다. 예수라는 신화적 인물은 영화에 비쳐지듯이, 기독교에서 구약시대를 종결시키고 신약시대로 새 시대를 연 인물이다. 허영과 편견이 가득한 기존의 율법과 기독교 근본주의에서 빠져나와 자신을 인자라 칭하며 인간을 사랑하고 평등을 주장하는 종교를 펼쳐나갔다. 안식일에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바리새이파의 주장과 예수의 옷을 잡고 좋아하는 아이들을 나무라는 것을 바로 고쳐 잡는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말하며, 이방인이나 창녀를 무시하는 이들을 꾸짖는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서는 유대인의 선민의식이나 인종차별(영화 중간 흑인영가가 나온다), 계급차별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그의 모습이 기존의 율법학자와 바리새이파들은 못마땅한 게 당연하다. 그는 율법과 관념에 매몰되지 않고 실질적인 사랑의 실천을 펼쳐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로마로부터 유대인의 해방을 기대하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기대와 달리 유대인을 오히려 훈계하고 꾸짖는 예수에게 실망하고 적잖은 저항감을 느낀다. 예수가 전한 복음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 못했던 것이다.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 하늘나라를 보기를 바라던 예수의 마음을 유대인은 알지 못했다. 예수의 이런 면이 파졸리니에게는 크게 다가온 것으로 추측된다. 과거 그리고 오늘날 현실과 괴리되고 관념론에 치우친 기독교 근본주의에 일침을 가하는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예수였던 것이다. 파졸리니는 예수에게서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현실을 바라보며 잘못을 바로잡는 개혁성 강한 유물론자를 보았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영화에 그려지는 예수의 설교하는 모습은 혁명가의 연설과 비슷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파졸리니는 예수에게서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인물상을 찾아낸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내가 바라본 <마태복음>은 33년이라는 예수의 생애를 2시간이라는 러닝타임에 담아내기 위해 점프와 생략을 통해 압축하면서도 감독이 드러내길 희망하는 부분(감독이 바라본 예수의 모습)을 인물의 클로즈업과 편집, 대사로 부각시키는 방법을 사용한 영화다. 글을 쓰면서 한 인물의 일생이라는 장구한 스토리를 2시간이라는 영화의 시간에 맞게 플롯을 구성하는 데 있어, 취사선택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이 그 인물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에 따라 취사선택은 달라지고 그에 따라 영화의 내용도 달라질 수 있음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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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쿤요   
2010-03-1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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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964,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tth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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