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포함이 되어 있을수 있고, 편의상 말을 짧게 합니다. 또 대사는 일부 틀릴 수 있으나 느낌을 전하기에 충분하리라 판단합니다. 마지막으로 오타가 많을 수 있으니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개인적인 느낌을 적어놓은 것이니만큼 의견을 주시면 감사히 수렴하겠습니다. ------------------------------------------------------------------------------------------------------ 살아가다보면 무언가의 우선순위를 정하거나, 간단한 규칙의 내기를 할 경우 동전을 이용한다.
앞과 뒤로 나누어진 작은 동전을 손가락으로 튕기고, 손등이나 손바닥, 혹은 손의 스냅을 이용해 낚아챈 뒤, '앞! 뒤!'를 외치곤 한다.
이 때, 앞과 뒤를 동시에 말할 수 없으며, 이 앞과 뒤의 특색은 완연하게 다르다.
재미있는 것은 그림(혹은 인물)이 있는 면을 앞이라고 하기도 했다가, 그 반대가 앞이라고 했다가 등으로 나름의 규칙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꼭 모든 내기나 우선순위를 동전으로 정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주머니를 뒤적여 가장 간단하게 정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동전의 특색과 꼭 닮은 것이 있다면, 역시나 인간일 것이다.
모두가 익히 알고 있듯, 인간은 하나의 면, 하나의 특징, 하나의 성향만을 갖고 있지 않다.
어떤 때에는 착하고 소극적인 사람이었다가도, 어느 순간 경쟁심이 발동(?)해서 전에 없던 적극적인 사람이 되기도 한다.
꼭 다중인격이나 정신분열증에 의한 환각 및 착각 등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쉽게 접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경쟁심은 언제 발동이 될까?
인간의 특성상,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은 욕구, 탐욕 등에 의해서 발생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물건', 혹은 '소유욕', '탐욕'에 의해서만 그러한 경쟁심을 포함한 이중 혹은 다중적인 모습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히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무언가 소유하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평소와 다르게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당연할테니까.
상세하게 그 원인이나 발단을 논하는 것은 인문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나 접근하자면 한 도 끝도 없을 작업이 되겠지만, 우리는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흔하게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다중, 혹은 이중적인 모습은 꼭 앞과 뒤 처럼 극단적이라기 보다는 빛이 있으면 생기는 그림자와 같은 개념으로써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흑백 논리처럼 백이 있으면 흑이 있다나, A가 아니면 B다 라는 식의 접근은 인간의 특성, 성격 등이기 때문에 확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영화에서 보여지는 이 그림자와 같은 모습들을 보자면 여러 예가 될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는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많은 돈을 소유한, 매너가 좋은, 매력적인 남성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사기꾼이고, 범죄자이다.
레커스 속 데이빗과 돈은 닉과 다르게 평화롭고 화목한 가정의 부부처럼 보여지지만, 숨겨진 모습들이 많고, 깊은 어둠을 소유한 자들이다.
그들이 원하고자 했던, 탐욕을 가졌던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자면, 개츠비는 사랑과 (가난한 자신을 뒤엎는) 돈일 것이다.
데이빗은 사랑하는 여자와 (문제아였던 어린시절을 감추기 위한) 인자한 모습일 것이다.
이처럼 그들이 원하는 어떠한 것들 때문에 빛을 받으면서 그림자도 함께 생겨나는 것이 양면을 가진 동전과 어찌보면 비슷하다.(동전도 앞, 뒤만 있는 것이 아닌 엄연하게 옆면도 존재하니까 더욱.)
그렇다고 '그림자'로 단정 짓기에도 무리가 있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선한 사람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악이 될 수 있고,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동전과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분명 동전은 두 면을 갖고 있지만, 앞과 뒤를 구분할 만큼 그 차이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선택이라는 것은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 아니 다른 여러 가능성을 선택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단일화 하여 그 수를 줄인다면,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선택할 수 없는 동전의 앞-뒤 게임 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이라는,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모습을 끌어안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게임(동전 앞-뒤)을 하면서도 우리는 잠깐동안 이라도 상대를 속이고자 할 때가 있고, 때로는 유리하게 해석하기도 한다.(이게 앞이지! 저게 앞이지! 같은)
조금만 더 나아가면 그것이 부질없는 짓인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마치 우리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지금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당장 눈앞의 상황만을 보고자하는 우리들의 모습처럼.
'그 때 동전이 없었더라면, 아니 던지지 않았더라면' 이라고 자책하고 후회해도 결과는 돌릴 수 없다.
우리는 그렇게 후회를 한다. 이 후회가 어떠한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1월의 두 얼굴'에서 체스터(비고 모텐슨)는 그러한 면모를 제대로 보여준다.
그는 부유해 보이고 결핍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름다운 나이어린 아내(콜레트-커스틴 던스트)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여행하는 그리스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함이 느껴지는 풍경을 갖고 있다.
더욱 화려한 장소도 존재하겠지만, 그곳은 그러하지 못하다. 넓은 배경으로 황량함이 느껴지는 그곳은 어딘가 결핍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곳에 아주 적합한 결핍 투성이로 보여지는 미국인 가이드 라이달(오스카 아이작)이 있다.
그는 아주 슬픈 눈을 하고 있고, 카메라가 잡아내는 그의 얼굴은 끝없는 슬픔이 느껴진다.
낯선 장소에서 만난 그들의 이야기는 결핍투성이고 완벽하지 않다.
라이달은 체스터에게 관심을 갖고 접근하고, 그들에게 호의를 베푼다.
이내 호의가 돈을 벌기 위해 이용하는 그의 수단이라는 것은 밝혀지지만,(1000달러라는 2000달러라고 속이는) 분명 그는 어떠한 악감정(?)을 품고 있진 않다.
그리고 그 호의가 의심으로, 불쾌한 감정으로 변하게 되는 것은 삽시간이다.
호의 아닌 호의를 베푼(?)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팔찌 덕에 그들은 엉키고 섥혀버린다.
그렇게 그들 모두 결핍이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자신이 이전에 저지른 행위 때문에 몸싸움을 하게 되고,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정당한 방어일 수 있었지만, 어쨌든 그는 죄를 범했고, 그것읅 감추기 위해 세치 혀를 놀린다.
손바닥을 하늘로 어찌 가리겠는가. 그가 가린 부분은 아주 단펵적인 부분이며, 조금만 옆에서 지켜봐도 훤하게 보인다.
그도 분명 그것을 알고 있지만, 계속해서 감추고자 한다.
신문에 나온 피해자의 얼굴을 컵으로 가리거나, 그 신문을 뒤집어 버리는 것으로 말이다.
신문을 뒤집는다고, 컵으로 가린다고 사실이 거짓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라이달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경계하고 의심한다. 아니, 처음부터 믿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다분히 모호함이 느껴지는 라이달과 콜레트의 관계였지만, 그 시작은 분명 그의 의심 때문이었다.
그러한 모습을 대변하듯,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붉은 가방을 놓지 않고 있다.
아마 알고 있었으리라, 자신이 지금 취한 모든 것들은, 아주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술과 담배에 의존하며, 꼭 끌어안은 붉은 가방을 보고 있자면, 우리들의 모습을 거울처럼 나타내는 것만 같다.
탐욕으로 인해 의심이 의심을 나으며, 마침내 그 의심의 바이러스는 콜레트에게까지 전염이 되어 버린다.
끝까지 그에게 동일한 마음이었다고 확언할 수는 없겠지만, 그녀는 분명 그를 믿었을 것이다.
처음 라이달에게 그가 다른 사람에게 사기를 치며 살아왔다고 말하는 것도 그녀였고, 어떻게 알고 있냐는 질문에 '우리는 부부'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분명 라이달은 젊고 매력적이기 때문에 둘의 사이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은 그녀와 그를 등 뒤에서 바라보는 체스터. 그 외에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녀가 그를 믿고 있는데.
하지만 균열이란 늘 그렇게 시작된다. 작은 금은 점차 커지고 결국 신뢰라는 댐을 무너뜨리게 된다.
작은 불빛으로 바라본 오래된 벽화에서 처럼, 그 자리에 그녀는 없다.
아니 원래 그 그림 어딘가에 그녀가 있었을지 모른다. 결국 그녀를 잃게 되었지만.
그녀를 잃으면서,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하지만, 마지막까지 붉은 가방을 놓지 않는다.
어둠속에서 눈을 뜬 라이달은 다시 그를 찾아내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주는 그 벽화처럼 그들은 움직인다.
하지만, 그러한 마차는 한쪽에서 놓아버리면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된다.
먼저 마차를 놓아버린 것은 체스터였고, 그들의 유착 관계는 그렇게 끝이 난다.
동전이 다른 모습을 소유하지만, 온전한 가치를 갖기 위해서 양 면 모두 소유해야한다.
마차가 나아가기 위한 벽화의 그 모습처럼.
1월의 두 얼굴, 동전의 양면, 벽화속 두 인물, 그리고 그림자.
그들은 결국 하나에 속해 있고, 다른 모습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한쪽을 져버릴 수는 없다.
앞과 뒤를 정하고, 규칙을 정할 수는 있지만, 그 모두를 소유하고, 마치 연결지어주는 교집합 처럼.
절대로 잊지 말아야하는 것은 그들이 결국 하나라는 사실이고, 하나로써 무언가를 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그 교집합의 존재를 오해하게 되고, 그것이 그들을 벼랑끝으로 몰 수도 있으니까.
동전을 던질 때 잘못 던지면 힘차게 굴러 강, 하수구, 바다 등에 빠져 영영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때로는 동전을 던지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될지도 모른다. 비록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거나 순서를 정하지 못하겠지만, 최악을 모면할테니까.
하지만 인간은 동전을 던진다. 그 동전을 던지는 순간. 인간의 탐욕이 발현되는 순간이니까.
두 얼굴을 소유한 1월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단지 1월이 두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처럼, 교집합을 가지고 있고, 우리와 다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싱거운 결말이 되었지만, 그래서 더 씁쓸하고 아프다.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슬픈 결말. '1월의 두 얼굴' 이다.
★ 5개 만점
★★★☆(스토리 6 연출 7 비쥬얼 7 연기 8 오락 7 총점 7) 누군가 일관성이 있다고 말을 해도, 절대로 그 모습만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 어딘가 다른 모습을 갖고 있고, 그래서 인간이다.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다. 분명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채우고 있지만, 그 모습들간 조금의 흠이 불완전함을 야기한다. 완벽할 수 없기에, 자신의 다양한 모습 때문에, 실수를 하고,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결국 단 한명만이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에, 눈물흘리고 또 다음을 생각하는 것이리라. 안타까운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기에 더욱 슬프지만, 우리는 안다. 그렇게 그는 조금은 나아갔을 것이라고. 최소한 동전의 양면이 하나임을 알았으니까.
동전의 양면처럼 우리는 하나를 둘로 분리해서 보려고 한다. 그 불완정한 모습에 발생되는 사건에 우리는 후회한다. 그 후회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음에도. 이미 늦었다. 돌리기엔 너무 많이 와버렸고, 그렇게 우리들을 반영하는 우리들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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