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 타는 동안에만 진실해도 괜찮아... ★★★★
1950년대 미국.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렉스(레이븐 애덤스), 알콜 중독인 엄마와 함께 사는 매디(케이티 코시니)는 남자들로부터 고통 받는 친구들을 모아 폭스파이어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한다. 이들은 자신들을 억압하고 착취해온 남성, 권력, 자본에 맞서 투쟁하고,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한다. 그러나 현실의 냉혹함은 그 자체만으로 소녀들에게 큰 벽으로 다가온다.
내 머릿속 1950년대 미국의 이미지는 <폭스파이어>에서 그리고 있는 미국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다. 아마 영화 속 세계를 뇌에 받아들인 결과일 것이다. 2차 대전 승리 직후의 떠들썩하고 흥겹고 뭔가 부흥이 막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적 느낌. 그러나 로랑 캉테 감독이 그린 1950년대 미국은 지독한 여성 차별과 흑인 차별, 자본가에 의한 가혹한 노동력 착취가 일상화된 공간이다. 정치적으로도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었던 1950년대가 결코 낭만적인 시대가 아니라는 게 바로 로랑 캉테 감독의 주장인 것이다.
<폭스파이어>는 소녀들의 열정과 시대의 냉정함이 절묘하게 직조되어 있어, 관객을 열정적 개입자 또는 냉정한 관찰자 어느 한 쪽으로만 머물게 하지 않으며, 캐릭터로 보면 열정은 렉스, 냉정은 매디로 대입되지만, 그것이 꼭 일치하지도 않는다. 사실 소녀들이 됐건 소년들이 됐건 또는 그 누구든 이상향을 꿈꾸는 저항세력(!)의 유토피아가 체제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 현실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걸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냉정하게 보자면 지금 지구에서 UN의 지원을 받는 공동체조차 10년을 넘기기 힘든 구조다.
자본주의에 저주를 퍼붓던 소녀들이 막상 자신들의 유토피아에서 먹고 살기 위해 돈이 필요한 현실, 모든 여성들은 같은 동지라고 여겼던 이상이 깨지는 순간들, 역할의 크고 작음에 따라 조금씩 나타나는 균열들, 멤버들 사이의 인식 수준 차이 같은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좌절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냉혹함이 소녀들을 짓누른다. 자신들은 비록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여성이지만, 흑인과 어울릴 수는 없다는 사고방식이야말로 이들의 처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보이는 장면이다. 누구나 평등하다고 선언한 그 유토피아마저도 권력과 관계에 의해 유지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은, 처음부터 무너지고 해체될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태어난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격적으로는 착한 악덕 자본가의 말에 분노한 렉스의 눈빛. 이 영화에서 제일 안타까웠던 것 중 하나는 결국 학습의 부재가 아닐까 한다)
물론, 이런 얘기를 하는 영화가 <폭스파이어>가 처음은 아니다. 그런데, <폭스파이어>가 다른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소녀들의 공동체, 혁명에의 투신을 그저 한 때의 열정,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 “그 땐 그랬지” 식의 회고담으로 추억하는 자세가 아니며 심지어 성장의 키워드로 바라보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얘기 중의 하나가 “20대에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젊은이도 바보지만, 40대에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인 중년도 바보다”라는 말이다. 여기에 마르크스주의자 대신 다른 용어를 넣어도 마찬가지다. 물론 나도 변했고 누구나 변한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도 했었던 그 열정을 왜 배반하는가. 세상과 타협해 버린 현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가장 뜨겁게 타올랐던 시기를 왜 부끄러워하는가. 렉스의 말처럼 “때가 되면 꺼진다고 해도, 불꽃처럼 타는 동안에만 진실하면” 되는 것 아닌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태운다 해도 말이다.
※ 비전문배우를 기용한 점, 다큐멘터리 느낌이 묻어나는 장면들, 현실적 공간 구성 등 <폭스파이어>는 누가 봐도 로랑 캉테의 영화임에 분명하다.
※ 감독의 <폭스파이어> 연출 의도에 대한 답변 “사회의 약자로서 여성, 사춘기 정체성의 문제, 정치, 사회적 저항 등은 50년대가 아니라 현재에도 지속되는 문제들이다”
※ 전작 <클래스>에 이어 비전문배우로 영화를 찍었는데, 인터뷰에 보니 이번에도 배우들의 즉흥 연기를 통해 자기의 언어를 사용하게 하고, 그 언어를 대사에 반영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무래도 비전문배우다보니 감정의 흐름을 위해 숏을 나눠서 찍지 않고 시간 순서대로 촬영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비전문배우들의 연기가 전반적으로 자연스럽게 느껴졌는데, 특히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역시 렉스역의 레이븐 애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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