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안습이지만, 거대함으로 용서가 된다... ★★★☆
외계인 공격은 하늘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근미래인 2025년 환태평양지진대의 가장 깊은 곳에 생긴 통로(브릿지)를 이용, 거대한 괴물 카이주가 등장, 인근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첫 번째 등장한 카이주를 겨우 물리친 인류는 연합군을 결성해 카이주에 맞설 초 거대 로봇 예거를 만든다. 최고의 파일럿 롤리는 전투 도중 파트너인 형이 사망하자, 예거 군단을 떠나 장벽 건설 노동자로 떠돈다. 한편, 세계 각국 지도자들이 예거 프로그램 대신 태평양에 거대한 장벽을 건설하기로 하자, 예거부대의 지휘관인 스탁커는 구식 예거를 조종할 수 있는 롤리를 찾아와 다시 예거에 탑승할 것을 부탁한다.
영화는 초반, 배경이 되는 이야기와 필요한 다양한 단어들을 나열하듯 설명하며 시작된다. 외계에서 온 괴물의 이름은 ‘카이주’, 이에 맞선 거대 로봇은 ‘예거’(독일어로 사냥꾼. <진격의 거인> 오프닝 노래의 첫 소절에 등장해 최근 익숙해진 독일어이다), 로봇과 조종사 2명의 신경을 접속하는 시스템인 ‘드리프트’ 등의 단어들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는 거대로봇을 보고 싶어 왔을 많은 관객들의 기대에 부합하듯 이런 것들을 짧게 설명한 후 바로 엄청난 사이즈의 예거와 카이주의 전투 장면으로 바로 돌진해 들어간다.
보기 전부터 이리저리 들었던 얘기처럼 <퍼시픽 림>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는 말 그대로 ‘안습’이다. 우선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가 너무 전형적이어서, 딱 계산한 만큼만 움직이고 설정된 대사만 나열하는 자동인형 같은 느낌을 준다. 드라마의 핵심을 이루어야 할 형의 죽음으로 인한 롤리나 카이주에 대한 복수로 괴로워하는 마코의 내면도 종이장처럼 얇아 관객의 가슴을 거의 흔들지 못한다. <에반게리온>의 싱크로에서 드리프트를 가져 온 이유가 아마 두 조종사가 서로의 머릿속을 들여다본다는 설정에서 찡한 드라마적 장치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은데, 이것 역시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거대 로봇과 소녀라는 이미지 자체는 대단하지만, 숨기거나 이야기 하지 못할 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또 하나, 대체 왜 스탁커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마코를 롤리의 파트너로 인정했는지, 파트너와의 첫 실험에서 과거의 트라우마로 실패한 마코가 어떻게 시련을 극복했는지 영화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그 이전에 훈련받을 때 마코는 어떻게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조종사로서 최고의 점수를 획득했던 것일까?) 아무튼, 길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라고 하기에 인간의 이야기는 거의 없거나 아예 시도하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그건 <철인 28호> <마징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거대 로봇의 웅장함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일본 에니메이션, 특히 거대 로봇 애니메이션의 덕후로 잘 알려진 길예르모 델 토로는 무려 2억 달러라는 엄청난 돈으로 <퍼시픽 림>을 통해 자신의 덕후질을 맘껏 과시한다. 정말 덕중의 덕은 양덕이랄까. 조종석이 머리에 있고, 조종사와 신경을 접속하며, 총이 아닌 주먹이나 칼로 직접 맞부딪쳐 몸으로 싸우는, 이 모든 것이 바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전통에서 내려 온 것이다. 그 크기를 실감하도록 영화는 여백을 거의 남기지 않고 예거와 카이주의 몸집으로 그 큰 화면을 덮어버린다.(따라서 가급적 이 영화는 아이맥스 등 큰 스크린으로 보길 권한다)
최근 영화 속 로봇들이 주로 빠르고 현란한 움직임을 보여줬던 데 반해, 길예르모 델 토로가 창조한 거대 로봇 예거들은 크기에 걸맞게 육중함으로 승부를 건다.(거대한 화물선을 마치 쇠파이프처럼 끌면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예거를 떠올려보라) 예거의 크기가 무려 80m. 고작(!) 8.5m에 불과한 옵티머스 프라임이 플라이급이라면 예거와 카이주의 싸움은 무제한급 경기를 보는 듯한 박진감과 긴장이 넘친다. 예거와 카이주는 때로는 바다에서 때로는 대도시에서 거대한 몸집을 이용, 주먹으로 타격하고 물어뜯고, 서로를 부여잡고 뒹군다. 그 무시무시한 타격감이 객석에 그대로 전달된다. 이야기, 캐릭터, 드라마가 약하다는 단점이 이 거대함 앞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마치 영화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거대 로봇과 거대 괴수의 대결이라니까. 뭘 더 바래?”
※ 딱히 거대로봇 애니에 환장했던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거대로봇은 사람이 들어가 조종하는 게 제격이다.
※ 영화를 보기 전에 한 기사에서 마코의 어린 시절 역할을 한 아시다 마나가 영어를 못해 힘들어 했다고 하는 데, 실제 영화에서 아시다 마나는 단 한 마디의 영어대사도 하지 않는다. 편집된 것일까? (아시다 마나가 힘들다고 했더니,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자신을 토토로라고 생각하라고 했다고. 길예르모 토토로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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