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 없이 끝까지 밀어 붙이는 과감성... ★★★★
어릴 때,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의 순서를 행성의 첫 글자만 따서 ‘수금지화목토천해명’으로 외우고 다녔더랬는데, 언젠가(2006년) 명왕성이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정확하게는 행성에서 왜소행성으로 지위가 변경됐으며, 명왕성(Pluto)이라는 이름 대신 134340이란 번호가 부여된 것이다. 명왕성이 행성에서 제외된 것은 행성에 적합한 충분한 중력을 가지고 있지 못해, 외부에서 작용하는 힘에 의해 궤도 운동이 불안정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아무튼 태양계 행성 중 막내가 행성이 아니게 됐다는 얘기에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인류가 나타나기 전부터 그 곳에 존재했고, 운동을 해 왔는데, 언제는 행성이라더니 이젠 행성이 아니라고 내치게 된 것이다. 영화 <명왕성> 속 어느 학생의 말마따나 명왕성은 루저인 것인가.
유명 사립고에서 항상 1등을 유지하던 유진(성준)의 시체가 발견되고 경찰은 같은 반의 준(이다윗)을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불러 조사한다. 알리바이가 입증된 준은 학교로 돌아가자마자 직접 만든 사제폭탄으로 몇 명의 학생들을 붙잡아 인질극을 벌인다. 이 와중에 토끼사냥이라는 비밀클럽 등 아이들 사이에 숨겨진 이야기들이 공개된다.
<명왕성>은 최근에 본 그 어떤 영화보다 어둡고 암울하며 잔인하다. 어지간한 호러영화보다 폐부 깊숙한 곳까지 공포감이 스며든다. 마치 디멘터에게 둘러싸인 기분이랄까. 과연 우리 사회의 미래에 희망은 있는가? 아니 미래 자체가 존재할 수 있는가란 깊은 절망이다. 교사 출신인 신수원 감독이 <명왕성>에서 하고자하는 얘기는 뚜렷하다. 입시전쟁에 내 몰린 아이들이 망가져 가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전시해 놓는 것이다.
아이들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 자기들만의 비밀클럽을 만들어, 자기들보다 높은 성적을 올린 아이들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고, 심지어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아이들의 폭력은 점점 더 강도가 심해지고 아이들의 얼굴에선 어떤 죄책감이나 죄의식도 찾을 수 없다. 자신들은 그래도 괜찮다는 천부적 권리를 부여받은 것처럼 행동하는 아이들. 마치 명왕성 정도는 언제라도 행성의 지위를 박탈할 수 있다는 태양 중심의 오만한 사고체계가 깃들여져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런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만드는 건 바로 어른들이다. 학생이 끔찍한 살인을 당했는데도 학교 측은 다른 학생들의 공부에 악영향이 미치는 걸 제일 두려워한다. 아니 기본적인 환경부터가 그렇다. 1등부터 10등만 따로 모아 가르치고, 등수가 매겨진 책상의 주인은 시험 볼 때마다 바뀐다. 심지어 10등 이하의 학생들은 저녁 10시만 되면 불을 소등해, 더 공부를 하려면 복도로 나오게 하는 불편함과 치욕을 감수하게 한다.
적나라한 신자유주의 사회의 풍경을 학생들은 사회가 아닌 학교에서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치욕을 경험하지 않으려면 경쟁에서 살아남아라, 다른 학생들을 짓밟고서라도 위로 올라서라, 학교에 친구는 없다 모두 너의 경쟁자뿐이다. 과목당 수백만원의 고액 과외가 판을 치고 사회의 계급구조는 그대로 학교에서 재현된다. 누구는 태양이고, 누구는 명왕성인 뚜렷한 계급구조가 학교 안에 펼쳐진다. 이런 공간에서 아이들이 미래의 희망을 꿈꾼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신수원 감독은 이런 끔찍한 광경을 신파나 판타지로 얼버무리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과감성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가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마조마 했는데, 끝내 파국으로 밀어붙이는 과감성이 정말 마음에 든다. 대안이 없지 않냐고? 영화가 무슨 학술지인가? 영화가 현실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대안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대안도 마땅치가 않다는 게 영화보다 더 큰 절망을 안겨준다. 이런 흐름이 어디 선간 방향을 바꾸어야 할텐 데, 그렇지 않다면 학교를 넘어서서 모든 사회가 정신병동처럼 변할텐데.... 그런데 어디서? 누가? 어떻게?
※ 장편 데뷔작인 <레인보우>에서도 그랬지만 <명왕성>에서도 신수원 감독은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그 자체의 소중함을 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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