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 http://mqoo.blog.me/100118751185
황해 (Hwanghae / The Yellow Sea, 2010)
나홍진 감독, 그리고 배우 김윤석과 하정우. 이들이 다시 뭉쳐 한 편의 영화를 찍었다. 같은 감독과 같은 배우, 그리고 같은 스텝들이 또 영화를 찍는다는 것. 그것이 속편이 아닌 이상에야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직 그들이 할 얘기가 남아있는 거라고. 한 편의 영화로는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마저 꺼내려 한다 말이다. <추격자> 그후 3년 남짓, 나홍진 감독의 <황해>가 개봉하였다.
영화 <황해>를 보고 감독의 전작인 <추격자>를 안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사실 무리다. 낯익은 그림에 대한 단편적인 나열. 쫓고 쫓기는 '추격'이라는 큰 맥락. 게다가 김윤석이 하정우를 쫓음. 무자비한 살인 장면의 노출. 덕분에 두 영화 모두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 공권력, 유독 경찰권의 무능력함. 남성 중심의 영화. 여성은 (거의)언제나 피해자. 여기서 더이상 나열하는 건 시간낭비이다.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황해>가 <추격자>와 얼마나 닮았느냐가 아니라, 두 영화가 어떻게 다른지이다. 두 영화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굳이 <황해>를 찍을 필요가 있었을까?
한 번 못 박고 가자는 이야기지만 <황해>는 결코 <추격자>의 속편이 아니다. 그냥 막 떠오른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 하나. <추격자>에서는 살인범이 자기가 죽였다고 자백을 했음에도 풀려나는 반면, <황해>에서는 살인을 하지 않았는데도 살인범으로 몰려 경찰의 추격을 받는다. 그렇다면 나홍진 감독이 <황해>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이 물음이 이 글의 출발점이다.
(존재만으로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배우가 있다. <추격자>를 보고나서 혼자 이런 생각을 했었다. 김윤석. 이 배우가 5년, 10년 후에는 어떤 위치에 올라있을지 기대된다고. 10년이 무어냐. 겨우 3년이 지났는데 이 정도인걸. 영화를 본 사람만 아는 면가의 호텔 스위트룸 씬.)
우리는 먼저 <황해>를 보고난 뒤 응당 고민해야만 한다. 우선 떠오르는 두 가지 물음. 첫 째, 감독은 왜 조선족을 영화로 끌어들어야 했는가. 둘 째, 영화는 왜 네 동강이 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첫 번째 물음에 대한 생각. 감독의 전작 <추격자>는 서울의 일부만을 그 배경으로 사용한데 비해 <황해>의 로케이션 규모는 블록버스터 뺨 친다. 영화는 연변에서부터 강원도와 전라도를 제외한 전국을 모두 아우른다. 나는 결코 감독이 영화의 스케일을 키우기 위해 조선족 이야기를 끌어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황해>는 꼭 연변에 사는 조선족이 아니더라도 성립 가능한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왜 굳이 '조선족의 이야기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한 가지 힌트는 감독의 전작인 <추격자>를 떠올리는 것이다.
영화 <추격자>는 03년부터 04년까지 서울과 그 인근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영화의 출발이 현실의 사건에 있는 것이다. 동일하게 07년 1월, 경기도 안산의 한 지하철 역에서 30대 여성의 토막사체가 발견되었고, 수사결과 사건의 범인은 조선족으로 밝혀졌다. <황해>에서도 이와 아주 유사한 사건이 등장한다. 차이점이라면 단지 살인자가 한국인이고 피해자가 조선족이라는 치환 정도. 하지만 이 실제 사건이 영화의 모티프가 되었다, 라고 쉽게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영화 내에서 30대 조선족 여성 토막살해 사건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적을 뿐더러, 이 사건은 영화의 중심사건들과는 거의 관련을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나홍진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현재형의 이야기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현실과 영화 사이의 접합점. 돈을 벌기 위해 황해를 건너온 현실의 조선족 여성. 그리고 생각의 시작. 연변에 있을 그의 남편. 그의 생활에 대한 물음표. 그가 황해를 건너와 벌이게 될 행위들. 그가 마주치게 될 어떤 부조리. 그래서 이야기하고야 마는 현재의 우리 사회, 대한민국. 그래서 필요한 이방인, 김기남(하정우).
이번엔 두 번째 물음. <황해>는 모두 네 개의 장으로 나눠져 있다.(1. 택시운전수 2. 살인자 3. 조선족 4. 황해) 여기서는 '구성되어 있다'라는 표현보단 '나눠져 있다'는 말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언듯 멀쩡한 영화를 네 조각으로 쪼낸 느낌이 든다. 이러한 작태는 영화의 몰입을 방해할 뿐더러, 각각의 이야기를 연장선상에서 따로 떼어내어 기억하기 십상이다. 혹, 비교적 긴 런닝타임에 대한 배려였을까? 그건 아니다. 감독이 관객을 배려했다면 (매우 다의적인 의미로)결코 영화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역으로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황해>가 네 개의 장으로 나눠져있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잃게 되는가.
(유독 차량추격, 차량충돌, 차량전복 씬이 많았던 영화. 우리나라에는 한적한 도로가 드물어 차량 씬을 찍기가 어려운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나홍진 감독이 두 번째 장편만에 이 정도 스케일의 영화를 찍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그 정신없는 편집이란.)
감독이 영화의 구성에서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것은 분명 실보다 득이 많은 까닭이다. <황해>는 결코 네러티브에 집착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의 밀도가 떨어진다는 것이 다분한 사실이며 앞 뒤가 애매한 부분도 더러 있다. 아무래도 감독은 관객들이 이야기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황해>의 이야기는 결코 매력적이지 않다. 대신에 영화는 빠른 편집을 통해 이야기의 허술함을 보완하고 영화를 네 토막으로 나누어 이야기로의 지나친 집중을 막고 있는 듯하다. 관객들이란, 유독 영화의 이야기만을 좇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 않은 영화를 보면서 내용만 좇는 것만큼 바보같은 일 또한 없다. 나홍진 감독이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결코 이야기가 아니다. 단편적인 예로 (극의 진행속도에 가속이 붙는)후반에 기남이 자신의 배후를 추적하는 과정을 떠올려보자. 그것은 여타 영화들의 비슷한 장면에서 보아왔던 긴박감이나 치밀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단지 극의 진행을 위해 건너뛰지 않고 보여준다는 느낌이 강할 뿐이다. 이건 나홍진 감독의 역량 문제가 아니다.(생각해보라, <추격자>에서의 여러 장면들을) 내용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또 다른 증거. <황해>에서 내용의 종착점인 결말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홍진 감독은 그의 영화에서 (이야기가 아닌)무엇을 보길 바랐던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제일 첫 번째 물음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가 같은 배우, 같은 스템들로 또 영화를 찍은 까닭. 아직 남아있는 할 얘기라는 게 무엇일까?
영화는 구남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내가 열한 살 때 동네에 개병이 돌았다.' 아가리로 물어 죽일 수 있는 것들은 다 물어 죽여야만 하는 개병. 그리고 지금 다시 개병이 돌고 있다고, 감독은 구남의 입을 빌려 고백한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나오는 이 독백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전부일까? 아니다. 폭력의 만연, 미쳐가는 세상. 이는 더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숱한 영화들에서 다뤄져 왔고, 그것이 전부였다면 굳이 <황해>를 찍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구남의 독백은 '죽은 개를 땅에 묻어주었다'로 끝나지 않는다. 그 이야기의 마지막은 '어른들이 묻은 개를 다시 꺼내어 잡아 먹었다'는 것이다.
(요건 서비스 컷. 마작판에서 신의 기술을 선보이는 구남. 사실 나는 <추격자>에서 하정우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었다. '아무리 봐도 조승우 같은데..' <황해>를 보면서는 찍으면서 정말 고생했겠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만 그랬던 게 아닐테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개싸움이 떠올랐다. <황해>에서는 투견이 한 장면도 나오지 않지만, 왠지 영화를 본 뒤 극장을 나설 때면 개싸움을 본 듯한 착시마저 든다. 생각해보자. 면정학(김윤석). 그를 과연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면가라는 인물이 갖는 비현실성은 그가 곧 싸움개이기 때문이다. 한 번 물면 숨통이 끊어지기 전까진 결코 놓는 법이 없는 싸움개. 감독은 이러한 투견을, 그것도 개병에 걸린 조선족 투견을 대한민국에 풀어 놓는다. 이건 뭐 개판이 따로 없다. 게다가 사람의 싸움이 아니기에 법도 그 구속력을 잃는다.(영화 속 사건현장에서의 공권력의 배제) 그런 그를 상대하는 김태원(조성하) 역시 싸움개가 되어야만 했다. 면가도 처음엔 사람이었다. 개를 부리는 사람. 기남이라는 투견의 주인. 기남은 실패한 싸움개이다. 상처만 입고 누구하나 숨통을 끊지 못했다. 하지만 실패한 투견이라도 개다. 개병 걸린 개가 돌아다니면 몽둥이로 때려 죽여야 하고 묻었으면 다시 꺼내어 잡아 먹어야만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아이러니, 기남의 경우. 그는 영화 내내 그 많은 사건에 휘둘리며 중심에 있었음에도 한 번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다. 심지어 그가 스스로 '죽이겠다'고 결심한 후조차 그 기회는 오지 않는다. 이로써 영화 속 사정과는 별개로 관객의 입장에서는 유독 그에게만 면죄부가 주어진다.(이는 그를 동정하거나 편 드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허나 그가 일삼는 폭력과 다른 두 인물이 행하는 폭력. 이 둘은 과연 다른 속성의 것일까? 영화는 종반으로 갈수록 개판이 되어간다. 무분별한 폭력과 살인의 난무. 닥치는대로 물어 뜯는다. 모두 개병이 든 것이다. 개병 든 개는 숨통이 끊어지기 전까지 날뛴다.
나홍진 감독은 전작 <추격자>를 통해 현재형의 불특정을 향한 폭력과 이를 제지할 능력이 없는 허술한 시스템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그는 후에 <황해>를 찍음으로써 다 하진 못한 이야기, 동일선상에서의 논의 같지만 좀 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자 하였다. 그 물음이란 '우리사회에 왜 개병이 도는지'가 아니다. <황해>는 결코 폭력의 원인에 주목하고 있는 영화라 볼 수 없다. 다만 감독은 개병 들어 죽은 개를 다시 꺼내어 기어이 먹고 마는 (사람들로 구성된)사회와 스스로 싸움개가 되어야만 하는 현실에 물음표를 달고 싶었던 게 아닐까?
물론, 아직 더 생각해야할 문제는 수두룩하다. 하지만 늘 그렇듯, 말이 길어지면 의미는 사라진다.(지금도 충분히 긴데?) 때문에 문장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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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열한 살 때 동네에 개병이 돌았다.
울 집 개도 개병이 걸렸는데 제일 먼저 제 어미를 물어 죽이더만 후에는 제 아가리로 물어 죽일 수 있는 것들은 몽땅 물어 죽였다. 동네 어른들이 죽이려고 하자 그 개는 도망갔다. 그리고 몇 날이 지나서 그 개는 삐쩍 마른 꼬라지로 다시 나타났다. 개는 나를 보더니 천천히 드러누워 죽었다. 나는 그 개를 동네 뒤에다 묻어줬고 그날 밤에 다시 꺼내져 어른들한테 잡아 먹혔다.
내가 그걸 기억하고 있는 건 그때 이후 돌지 않던 개병이 돌았기 때문이다.
개병이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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