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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런 경우는 아주 많았다. 원작을 알고 영화를 볼 경우, 자꾸 본인도 모르게 원작과 비교하게 되고 그 비교잣대로 영화의 완성도와 재미를 평가하게 되는 것 말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필자는 그러한 행위가 얼마나 편협하고 괴로운 일인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일을 깨닫게 되는 순간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과 같다.
<안나와 알렉스>는 그런 영화였다. 만약 내가 이 영화의 원작인 <장화, 홍련>을 모르고 봤더라면, 필자는 아주 훌륭한 평가를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원작의 향취는 나의 몰입을 철저하게 방해했다. 이래서 리메이크 영화를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인가보다.
원작을 지운 채 이 영화를 본다면 꽤 볼만한 영화를 만나게 될 것이다. 공포영화가 보여주는 '공포'의 근원에 대해 말해보자면 이른바 "비극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반면 <안나와 알렉스>가 보여준 것 처럼 "잔혹한 진실을 알아가는 공포"도 있다. <안나와 알렉스>는 그 '잔혹한 진실'에 대한 충실한 접근을 보여준다. 이 부분은 원작인 <장화, 홍련>도 보여주는 부분이지만 <장화, 홍련>이 함축과 생략으로 더 많은 이야기거리와 스산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반면 <안나와 알렉스>는 매우 친절하다. 관객은 푹신한 의자에 앉아 팝콘을 먹으며 영화의 친절한 설명을 따라가기만 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수준의 영화다. 사람에 따라 그런 친절한 설명을 편하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그런 '과잉친절'이 좀 심심한 편이다.
또 헐리우드 공포영화의 특징을 생각해본다면 나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편이다. 원작인 <장화, 홍련>에서 사망자가 거의 없었던 반면 <안나와 알렉스>는 꽤 많은 인물이 죽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헐리우드 공포영화의 전형적인 노선이다. 이 영화는 애시당초 원작과 노선을 달리 하기를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헐리우드에서는 나름 흥행성적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헐리우드에서는" 말이다.
필자가 이 영화를 쉽게 공감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필자가 대한민국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랬기에 이 영화는 원작과 비교해봤을때 아쉬운 부분 투성이다. 특히 원작 <장화, 홍련>이 보여준 '앤티크'한 세트의 분위기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서양의 특성상 '앤티크'한 집이라는게 어울릴리야 없겠다만은 적어도 원작에서 '집'이 보여준 역할은 <안나와 알렉스>의 집은 반의 반도 못 따라가고 있다. 김지운 감독의 말을 좀 빌리자면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집'이다"라고 말할 만큼 원작에서 집은 매우 중요한 역할이었다. 아마도 <안나와 알렉스>는 의도적으로 '집'의 역할을 포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앞서 언급한대로 원작과 노선을 달리 하길 시도한 영화였기에 '집의 역할'을 포기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단, 그것이 꼭 필요한 행동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헐리우드 영화는 세트가 많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것이 래더페이스의 작업실처럼 더럽고, 어둡고, 끈적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샤이닝>에 등장하는 호텔처럼 차갑고, 밝지만 음습한 느낌을 보일 필요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원작의 스산한 이야기를 평범한, 아니 지나치게 아름다운 배경에 깔아둔 탓에 이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그저그런 하이틴 호러'로 전락해버렸다. 물론 <13일의 금요일>, <스크림> 류의 하이틴 호러를 즐기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원작을 모를 때"의 일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필자는 <장화, 홍련>의 앤틱 느낌 강하고, 스산한 세트와 기이하고 조용한 인물들을 매우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흔한 헐리우드 호러영화에서 보기 힘든 캐릭터와 행동과 세트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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