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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모성애는 본능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버지가 있을 때 엄마가 가질 수 있는 본성 중 하나 일 뿐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의 엄마는 모성애뿐만 아니라 생존능력과 보호능력까지 겸비한 슈퍼맨이 된다. 거기에 이성적인 사랑에의 열망까지 어느새 합쳐져 오이디푸스의 왕비이자 어머니가 되는 동시에 아버지의 성격까지 합쳐진 불순물, 괴물로 변형한다. 이것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마더 mother’이자 ‘머더 murder’이다.
바보는 사회적 약자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말하는 약자는 바보가 아닌 엄마가 없는 자이다. 도준이 감옥에서 나오는 대신 누명을 쓰게 되는 다운증후군 환자, 그 아이가 이 사회의 약자이며 약탈당하는 환자인 것이다. 영화는 도준과 엄마를 통해 진정한 사회적 약자는 엄마가 없는 이들임을 이야기 한다. 진구도, 죽은 문아정도, 다운 증후군 소년도 엄마가 없다. 엄마가 없으니까 죽거나 당하는 입장에 놓인다. 영화에서 도준이 도준일 수 있는 이유는, 또한 도준 만이 억울하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마더’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도준이 바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바보가 아니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정확히 반, 마치 도준이 얼굴의 딱 반 만을 두들겨 맞듯이 그 반만큼만 바보라 한다. 해서 도준은 모든 게 반이다. 기억도 반, 죄의식도 반, 표정도 반, 사랑도 반이다. 반이라는 것은 곧 0이라는 것이다. 마이너스와 플러스의 중간지점에서 도준은 왔다 갔다 한다. 기억이 아예 없거나, 끔찍한 기억을 가지고 있던가. 죄가 무엇인지 모르거나, 살인을 저지르거나. 무표정이거나, 웃거나. 여자랑 섹스 하는 게 사랑이거나, 엄마랑 자는 게 사랑이거나. 하지만 그의 상태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그 중간 0 이라는 중간지점, ‘반’에 있다. 그가 그 ‘반’뿐인 것이 바보로 불리 우는 이유이다.
네러티브의 전개 또한 도준처럼 반, 반씩 진행 되고 있다. 처음에는 복선을 반 만 깔고 그게 다인 듯 이야기하나, 그것으로 결과를 추측하기엔 무언가 빠진 듯하다. 해서 영화의 순차적 흐름에 순응하며 관객이 또 무슨 복선이 있었나 추측하려는 찰나, 다시 전에 보여줬던 나머지 반의 복선으로 나머지 결과를 이야기한다. 속았던 관객이 감탄하며 다시 그 결과로 다음 추리의 예상을 하려는 찰나, 이번에는 전에 보여줬던 결과가 끝이 아니었음을, 그것이 다시 앞의 복선을 암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가 데칼코마니 접듯 흐름 상으로 정확하게 대칭일 수 밖에 없고 끝까지 결과를 알 수 없는 이유는 이‘반’이라는 설정 때문이다. 해서 엄마가 춤을 추고, 도준과 엄마가 밥을 먹고, 밤에 잠을 자고, 그 밖에 살인과 추리의 과정까지 모든 공간과 모든 사건이 두 번씩‘반’씩 반복해서 보여진다. 이 때문에 관객은 차마 의심하지도, 그렇다고 아니다 결론 내리지도 못한 채 영화라는 의식 속에서 허우적 거리다 끝이 되서야 깨어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 어머니가 생각난 까닭은, 가족의 짙은 애증관계가 소름 끼치면서도 이해가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서럽고 슬프고 찝찝한데 딱히 이 감정이 뭔지 몰라 정신을 차려보니 가슴 한 구석이 애리는 이유는 이것이 내가 사는 지리멸렬한 사회의 단면임을, 그 더러운 단면의 조각들 중 몇 개는 나 역시 가진 시선중의 하나임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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