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영청 떠 있는 보름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눈이 휘둥그레져 되묻는다. “그러니까 저기에 사람이 가 있다는겨?” 호롱불로 밤과 어울리던 오지의 시골 마을에 처음 전기가 들어오고 처음 텔레비전을 구경하던 날, 사람들은 암스트롱이 달을 거니는 믿기 어려운 장면과 마주친다. 좌중의 놀라움은 젊은 처자의 천연덕스런 질문으로 정리된다. “그럼 달도 미국땅이 된 겨?”
전깃불을 과학의 최대 수혜처럼 감지덕지할 때, 누군가는 우주선을 띄우는 놀라운 불균형의 시대, 1969년. 예컨대 박정희가 세 번째 대통령 임기를 누리려고 헌법을 멋대로 뜯어고치려 할 때, 대학생들은 별이 쏟아지는 밤에 미팅하랴, 계몽과 봉사 정신으로 농촌을 누비랴, 삼선 개헌 반대 데모를 벌이랴 분주하다. 권력은 젊은 반역자들을 간첩단 같은 조직 사건으로 엮어 시대를 훈육하곤 했다. 이런 혼돈과 불균형이 인간의 미세한 운명에 평지풍파를 일으킨다 한들, 그러니까 사랑의 아름다운 여백을 순식간에 지워버린다 한들 믿지 않을 수 없다. 석영(이병헌)과 정인(수애)의 10년 같은 10일, 아니 일생을 건 10일의 사랑은 그래서 가능하다. 10일 이후의 긴 여백을 채우는 건 그들의 순수가 아니다.
미스터리 같은 시대와 미스터리 같은 사랑에 어울리는 건 미스터리 같은 인물이다. 석영은 삐딱한 대학생이다. 학내 집회의 한구석에 앉아 있긴 한데 매우 불편해하는 모습이다. 구호와 손을 내지르지만 힘이 담기지 않는다. 여대생들과 집단으로 어울리는 미팅의 한구석에 앉아 있긴 한데 심드렁하다. 으리으리한 부촌의 골목길을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다 지엄한 아버지를 만나는데 어딘가 반항적이다. 석영이 운동권이 작당한 농촌봉사활동에 갑자기 뛰어드니 운동권 친구 균수(오달수)가 놀랄 만하다.
모기와의 사투로 첫밤을 꼬박 샌 석영이 ‘나, 서울로 돌아갈래’라고 결론짓는 건 타당해 보이는데 정인(수애)의 미스터리가 그 발길을 잡는다. 운치있는 폐가에서 뒤죽박죽 음정으로 목청을 가다듬고, 갸우뚱한 국민체조로 가냘픈 허벅지를 드러내며 이른 아침을 맞이하는 정인을 목도한다. 석영에게 환한 미소를 선사하는, 운명적인 마주침이다. 정인은 당당하고 순백하다. 서울서 온 대학생들 앞에서 어설픈 노래와 춤을 당당히 내지르고, 도서관 사서임에도 <경아의 꽃을 꺾은 남자> 같은 ‘빨간 이야기책’을 마을 어른들에게 서슴없이 낭독해준다. 게다가 그녀는 가족도 없다. 정확히는 부모가 월북해버렸다.
자유로운 영혼의 부자 대학생과 산골의 신비스런 고아 사서가 어울리는 공간은 순수해야 할 것이다. 비록 글을 읽지 못하는 마을 이장이 고집스럽게 군사훈련을 시키는 풍경이 끼어들기는 하지만, 고마운 전깃불이 자식을 송장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수내리 산골은 동막골을 닮았다. 찌든 가난이나 매서운 증오의 기운이 없다. 농활 대학생들과의 갈등 같은 긴장감도 없다. 1969년은 그랬을지 모른다. 석영의 절친한 친구 균수가 운동권이기는 하지만 이념적으로 보이지 않는 건 그 시대의 순수일 수 있다. 혹은 감독의 순수일 수 있다.
균수가 반드시 이념적일 필요는 없지만 코믹해야 할 필연도 없다. 이 지점에서 오달수의 균수는 <그 해 여름>의 이상한 단추가 된다. 독신으로 평생을 보내는, 멋있는 교수 석영의 과거를 좇아 액자 구조를 만들어가는 방송국 김 PD(유해진)과 방송작가 수진(이세은)보다 더 기묘한 자리에 놓인 캐릭터다. 오달수의 균수(가 벌이는 코믹)는 <그해 여름>의 순수가 탈색된 것이라는 흔적이다. 석영과 정인의 공통점은 자신들의 태생적 테두리(말하자면 계급적 신분)에 초연한 순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탈색된 순수라기보다 21세기의 젊음과 소통하기 위한 고육지책처럼 보인다. 석영이 유일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자본의 아버지는 그의 자유로움을 끝내 오염시키지 못하며, 정인이 편백나무의 은은한 향기처럼 사랑하는 이념의 아버지는 유령처럼 겉돌뿐 그녀의 삶의 지침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21세기적 스타일을 은연중에 지닌 아름다운 청년과 처녀가 1969년과 만나기 위해 필요한 디딤돌이 균수다. 그들을 자연스럽게 여며주기 위해 균수는 시대적인 동시에 시대적이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그 외모가 코믹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석영과 정인의 사연에는 시대의 절절한 아픔이 반영된 개연성이 담겨 있다. 일생을 바친 10일간의 사랑이라는 건 유효할 수 있지만, <그해 여름>은 이것이 영화적 공간에서 가능한 판타지라는 걸 동시에 입증해버렸다. 균수와 수내리 같은 탈색된 순수를 통해서. 가치보다 효용을 따지는 시대를 거슬러 순결한 사랑의 가치를 감동적으로 웅변한다는 선택에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허풍과 겉멋은 삶의 윤활유일 뿐이라는 걸 유머 넘치며 짠하게 보여준 <품행제로>에 비하면 더욱더. 처연한 여운은, 굳이 먼 과거를 빌려와 만든 10일간의 사랑이 이 시대에 온통 자신을 내던질 만한 것이라는 데 동의하더라도 판타지로 가능하다는 역설에서 생겨난다. 순수를 확신하고 향유하는 건 불가능한 시대가 아니냐는 역설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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