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이케 다카시의 <착신아리>는 무서웠다. 그 무서움의 근간에는 때와 장소를 알고 출몰하는 원귀와 ‘학대가 학대를 낳는다’는 탄탄한 명제가 자리했다. 여기에다 일본 특유의 빛과 공간이 결합했다. 크고 작은 미닫이문과 꺾어진 계단으로 분절된 집. 정원은 빛으로 가득해도 등 뒤 거실에는 시커먼 어둠이 놓여 있다. 밝은 곳에 서 있다고 안심할 수가 없다. 귀신의 손 혹은 머리카락은, 대낮에도, 빛과 맞닿은 어둠 속에서, 미닫이문과 계단 틈에서, 스멀스멀 뻗쳐온다. 도망치는 건 부질없다. 죽음을 피하려면 귀신의 상처를 정면으로 껴안아야 한다.
<착신아리>의 마리에, 미미코 모녀도 아픔을 이해받은 뒤 좋은 곳으로 떠났다. 하지만 쓰카모토 렌페이 감독은 그 다음 얘기를 해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일본의 한 중국 음식점에 익숙한 벨소리가 울려퍼지고 딸의 휴대폰을 대신 받은 아버지는 상황도 모른 채 죽음을 맞는다. 죽음의 메시지는 또 다른 희생자를 낳고, 희생자들에게선 사탕 대신 석탄가루가 발견된다. 세 번째 메시지를 받은 쿄코는 연인 나오토와 어떻게든 죽음을 막아보려 하던 중 르포라이터 다카코로부터 석탄가루가 대만산이란 말을 듣고 대만으로 향한다.
중국 음식점이 등장할 때부터 변화는 예고된 것이었다. 일본의 빛과 공간은 대만의 그것으로 대체됐고, 미미코짱을 대신하기 위해 대만의 ‘원조 귀신’ 리리가 섭외됐다. 저주받은 아이라고 입이 꿰매져버린 대만 소녀는 “네 아픔 이해한다” 해도 도무지 마음을 풀지 않는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러브스토리를 끼워넣고, 그걸로 미흡하다 싶었던지 <식스 센스>식 반전을 가져온다.
일본 귀신이 대만 귀신으로 변했다고 탓할 건 아니다. 얄팍한 사시미 칼이든 도끼 같은 대만 칼이든 요리만 잘하면 그만이다. 리리가 <디 아이>의 링과 똑 닮았고, 유치원신은 <검은 물 밑에서>를, 우물 귀신은 <링>과 <주온>을 연상시킨다고 비난하는 것도 아니다. <착신아리>에도 새로운 것은 없었으니까. 문제는 외형은 잔뜩 가져왔으되, 무섭게 해줄 감각도, 절제된 결합을 가능케 할 근간도 없다는 데 있다. 사연은 너무 많고, 귀신도 너무 많고, 사랑도 너무 많다. 불행히도 칼을 잡은 요리사의 마음이 갈팡질팡했는지 볶아낸 각종 야채를 우유에 말아버린 듯 요상한 맛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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