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부정을 목격한 안과의사 선재(김혜수)는 어린 딸 태수(박연아)와 단 둘이 살기 시작한다. 그즈음 선재는 지하철 칸막이에 주인없이 놓인 분홍색 구두를 집어오고, 그걸 신어보고 싶다는 태수까지 거칠게 밀쳐낼 정도로 집착하게 된다. 이미 여고생 한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적이 있는 분홍신. 그 마력에 사로잡힌 선재와 태수는 분홍신을 두고 몸싸움까지 벌이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조금씩 불길한 기운을 느끼던 선재는 자신의 병원 인테리어를 맡은 인철(김성수)이 들고온, 분홍신을 품에 안은 무용수의 사진을 보고선 과거를 파헤치기 시작하고, 분홍신에 수십년 전 원한이 얽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안데르센의 동화와 모티브가 겹치는 <분홍신>은 그 동화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비슷한 동력원에서 에너지를 얻고 있다. 안데르센은 빨간 구두에 매혹된 가난한 소녀 카렌이 영원히 춤추라는 저주를 받고 스스로 발목을 자르기에 이르는 잔혹한 동화를 들려주었다. 사형집행인이 도끼로 잘라준, 빨간 구두를 신은 채 숲속으로 사라진 카렌의 발목은, 어디로 갔을까. 시간과 공간을 넘어 100년 뒤의 한국을 헤매고 있는 <분홍신>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원한이 덧없는 물욕으로 환생하여 여인들을 지배하는 괴담의 자리에 내려앉았다. 춤추는 두 여인과 그들의 사랑을 받은 한 남자, 엇갈린 애정을 타고 흐르는 피눈물. 창백한 스크린 위에서 유독 빛을 내뿜는 분홍신은 1940년대 일어났던 치정극을 난반사로 흩어지는 다툼과 증오의 현재로 인도한다.
남편에게 냉대받는 선재는 신지도 않을 화려한 구두를 사모아 예술품처럼 전시하는 취미를 가진 여자다. 그녀는 무채색 옷만 입고, 혼자 거울 앞에 서 있을 때만 어린아이 같은 욕망을 드러낸다. 그런 선재도 분홍신에만은 무방비다. 지독하게 아끼는 어린 딸과 거실 바닥을 뒹굴면서 <장화, 홍련>의 새엄마 은주와 큰딸 수미처럼, 악에 받쳐 손톱을 세우고 찢어지는 목소리로 소유권을 주장한다.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홀로 핀조명을 받은 듯 빛나는 분홍신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기에 이들을 거미줄처럼 휘감게 된 것인지, 모녀의 인연마저 쪼개놓은 것인지, 그리고 분홍신을 탐내는 여인들은 왜 다리가 잘린 채 죽어야 하는 것인지. <분홍신>은 그 힘을 설명하기 위해 과거의 무대를 한 조각씩 끈기있게 삽입해간다. 정결한 흰옷의 프리마돈나, 그녀 앞에서 웃고 있는 연출가, 두 사람을 독기어린 시선으로 뒤쫓는 붉은 입술의 무용수. 단서와 플래시백이 맞물리는 <링> <검은 물 밑에서>처럼 정교하지는 못하지만, <분홍신>은 1940년의 질투를 2005년의 탐욕과 나란히 배열하여 긴장과 공포를 유지한다. 여인의 한이 무섭다는 사실은 영화를 만드는 이와 보는 이 사이의 암묵적인 동의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와니와 준하>로 데뷔한 김용균 감독은 공포영화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선입견을 어느 부분에서는 극복한다. 분홍신을 언뜻 본 선재의 후배 미희가 구두를 빼앗아가는 장면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부글거리는 탐욕의 마개를 뽑아냈다는 점에서 섬뜩하다. 그는 마음속을 헤집는 것이다. 카렌의 허영심과도 비슷할지 모를 본능. 감추어둔 욕심이 충족되는 순간 여인은 환희로 떠오르는 비누거품이 되지만,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격언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 저주로 돌아와, 거칠게 비누거품을 움켜잡는다. 그러므로 다리가 잘린 여고생이 신었던 분홍신이 순식간에 핏물을 빨아들이고 깨끗해지는 <분홍신>의 첫 장면은 처음 주인이었던 무용수 옥이가 누구를 향해 복수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는 이 영화의 결말을 어느 정도 보완해주는지도 모르겠다. 사랑과 증오는 어느덧 휘발되고 분홍신만이 중요해진다. 탐욕에 미치면 원한의 대상조차 잊고 만다.
<분홍신>이 인공미가 과도한 세트로 뒤덮이지 않았다면 공포영화의 기능에 좀더 충실했을 수도 있다. 지나치게 아름답다는 사실은, 영화 속의 분홍신처럼, 때로 스스로를 공격하기도 하는 법이다. 장식적이고 초현실적인 고딕호러가 공포 그 자체에 있어서만은 <주온>의 조악한 빈집 귀신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나 생기를 빼앗긴 듯 하얀 얼굴과 겁에 질린 눈동자의 김혜수, 평범하게 귀엽지만 독하게 돌변하는 박연아는 <분홍신>에 완고한 표피가 갈라지는 순간을 부여한다. 삶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 그들의 드잡이만은 진짜다. 동시에 그들은 빈틈이 많은 과거와 현실의 교차점을 메워주기도 한다. 어디론가 사라진 선재의 남편 때문에 어머니와 딸이 극한의 감정을 오르내리는 짧은 시간은 기나긴 드라마를 순식간에 해결하고자 욕심을 내지만, 진짜였던 몇몇 대목이 포개지며,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는다. 그것이 온전히 드라마에서 흘러나왔다면 좋았겠지만.
여인의 질투라는 전형적인 테마에 기댄 <분홍신>은 정서와 미술로 드라마가 이루지 못한 파장을 일으킨다. 비어 있으면서도 복잡하다는 의미일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분홍신>이 곰곰이 따져보지 않고도 선재의 분홍신처럼 막무가내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영화였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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