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가 정전으로 멈추면 어떻게 해야 할까. 놀라거나 두려워 하는 대신, 춤을 추고 발을 구르고 주문을 외우면 된다. 문제가 해결되어 함께 있는 사람들이 기뻐하면, 차를 대접하거나 명함을 건네 친구로 사귀라고 도리스 되리 감독은 <파니 핑크>(1994)에서 말한다. 흔한 상황을 예외적으로 바라보는 그답게 <내 남자의 유통기한>도 예사롭지는 않다.
‘연애의 유통기한은 잘해봐야 3년’이라는 이제는 뻔해진 얘기도 되리 감독의 손에 잡히면 놀라운 주술과 리듬 속에서 탈바꿈한다. 낡고 칙칙한 연애담이 선도 높은 이야기로 요리되는 비결엔 <파니 핑크>식 점성술, 판타지, 엉뚱한 등장인물과 대사들이 있다. 무엇보다 남녀의 만남을 풍요롭게 하는 건 ‘말하는 잉어 부부’의 플롯이다. 한때 인간이었던 잉어 부부는, 3년 동안 변치 않고 사랑할 연인을 만나면 다시 인간으로 환생할 수 있게 된다. 과연 잉어 부부는 환생하고, 연인은 3년 넘게 사랑할 수 있을까. 이 궁금증과 긴장이 이야기를 밀고 가는 힘이다. 잉어 부부는 틈틈이 영화 속 연인의 상황을 설명하는 ‘변사’로서, 그리고 연인의 앞날을 암시하는 지표로서, 다른 무엇보다 주인공 부부의 운명에 대한 비유로서의 노릇을 한다. 잉어 부부와 함께 고려되어야 할 또 한쌍은, 영화의 성역할을 넌지시 알려주는 해마 부부다. 해마는 수컷이 수정, 임신, 육아를 한다.
수족관 속을 헤엄치는 다채로운 빛깔의 비단잉어떼가 영화를 열면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린다. 잘생긴 비단잉어떼가 다 사라진 뒤, 분홍색과 노란색의 단조롭다 못해 칙칙한 잉어 부부가 나타나 서로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무능하다’며 아내가 비난하면, 남편은 ‘저런 싸가지없는’이라며 속을 삭인다. 그리고 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장탄식을 한다. ‘왜 첫눈에 반했을까?’ ‘그야 당연하지. 서로의 실체를 몰랐으니까!’
일본 시골을 여행하다가 길을 잃은 패션디자이너 지망생 이다(알렉산드라 마리아 라라)는 마침 지나가는 택시에 타고 있던 레오(지몬 페어회펜)와 오토(크리스티안 울멘)를 만난다. 레오는 친절을 발휘해 이다를 태우려고 하고, 오토는 서로 방향이 다르다며 태우지 말자고 주장한다. 이다는 희귀 잉어 거래업을 하는 두 남자의 구애 공세를 동시에 받는다. 친절하고 사근사근하며 호텔에 머무는 레오를 고를까, 바닷가에서 텐트를 치고 머물며 물고기와 대화를 나누는 오토를 고를까.
이다는 오토와 입을 열고 ‘4만개의 박테리아를 교환’하기로 결정한다. 이다는 내친김에 바로 일본식 혼례를 치르고 바닷가 텐트에 랜턴을 밝히고 오토와 첫날밤을 보낸다. 잉어 부부처럼 그들은 함께 있기만 해도 즐거운 지복의 순간을 만끽한다. 2만유로짜리 희귀 잉어도 구하고, 권태기에 들어선 볼품없는 잉어 부부도 덤으로 안고 독일로 돌아간다. 그러나 눈멀게 하는 첫사랑의 폭풍우가 지나가자, 눈 번쩍 뜨게 하는 생활의 피로가 이다 부부를 덮친다. 물도 안 나와 머리도 제대로 감지 못하는 캠핑카에서의 집시 같은 삶 앞에서, 꿈 많은 이다는 절망한다. 오토는 ‘현실을 꼭 극복해야만 하는 것으로 아는’ 이다의 속물주의에 넌더리가 난다.
이다 부부가 친구 레오의 파티에서 돌아와 집으로 가는 길은 결혼이 얼마든지 사랑의 무덤으로 가는 비루한 여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비바람이 불어대고, 사방엔 인적 하나없는 벌판. 두 사람은 텅 빈 버스 정류장에서 서로를 비난한다. 이때 멀리에서 까마귀가 깍깍 울어댄다. 두 사람이 처음 사랑을 소곤거릴 때, 이런 장면은 아예 낄 자격조차 없었을 텐데, 현실 앞에서 사랑은 끊임없이 이지러지고 부식되고 흔들린다. 해마 부부의 전도된 성역할이 이다 부부의 생활과 맞물리며 돌아가는 이야기 방식은 신선하며 시사적이다. 이다가 임신 중에도 침대 앞에 베틀을 놓고 옷을 만들며 납품 기한을 지키려 할 때, 밤을 새워 수위 일을 한 오토는 조금이라도 소음을 줄이려고 욕조로 들어가 잠을 청한다. 이다는 아이가 울자 신경질을 내며 아이를 오토에게 내맡기지만 아이는 신기하게도 오토 앞에서 울음을 그친다. 도리스 되리 감독은 모성애 신화, 고정된 성역할, 육아와 성공을 향해 동시에 손을 뻗는 슈퍼우먼 콤플렉스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지만 질문을 던지는 방식은 유머러스하고 신중하다. 이다는 억척스레 성공을 위해 아이와 남편을 내던지는 괴물이 아니며, 오토는 멍청한 신비주의자가 아닌 것이다. 외로움에 떠는 레오의 아내 요코(김영신)나, 결혼 뒤에도 한결같이 이다를 쳐다보는 레오, 그리고 희귀잉어와 패션에 미쳐 서로에게 관심없는 바겐바하 부부는 이다 부부에 비한다면 부침은 덜하지만 매우 심심하고 한심해 보이는데 말이다.
<내 남자의 유통기한>은 사랑과 현실의 관계맺기를 직조하는 도리스 되리의 유쾌한 솜씨를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극중 잉어 부부가 이다 부부의 생활, 옷차림, 사랑에 영향을 뻗쳐가는 광경은 하나의 마술과도 같다. 이다는 화려한 잉어로부터 패션디자인의 영감을 얻으며, 오토는 볼품없는 분홍색 잉어의 변신 덕분에 이다에게 구박 아닌 사랑을 얻게 된다. 일본과 인도를 향한 맹목적 오리엔탈리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그들 문화를 재치있게 인용하는 방식도 눈여겨볼 만하다. 수십만유로나 하는 희귀잉어에 대한 열광이나 라즈니시적 명상을 깔보지 않으면서도 이야기의 속살로 만드는 건 재주라 할밖에. 1976년 데뷔 이후 시나리오 작가, 감독, 소설가로 활약하고 있는 되리의 상상력은 쉽게 메마르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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