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적이 끊긴 외진 곳으로 도시에서 서로 안면도 없는 사람들이 초대되어 죽음의 생존게임을 벌이는 소재의 공포영화는 의외로 많다.
<인형사>도 열린 듯, 닫힌 인형박물관에서 일어나는 괴이한 사건으로 인해 초대된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나간다는 내용이다. 특이한 것은 원혼(한 맺힌 여자귀신 등등), 살인마가 출연하지 않고 대신 고가!라서 더 아름다워 보이는 구체관절인형이 등장한다. 영화 카피가 “아름다운 공포”인만큼 인형들이 발산하는 고혹적인 분위기는 ‘공포’와 썩 잘 어울린다. <비천무>의 각본을 맡았던 정용기 감독의 데뷔작인 <인형사>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매혹의 공포를 선사함으로써 엉성한 세트!의 단점을 커버한다.
어찌됐든 ‘귀신’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공포영화의 지긋지긋한 관습을 위반하는 일이다.
하지만 인형의 영혼인 ‘생령’이 그 자리를 대신해 ‘원혼’과 별반 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아 관객에게는 애매모호한 공포의 존재로 느껴져 인형을 내세운 영화의 기둥은 건실해 보이지 않는다.
구체관절인형의 모델이 되기 위해 초대된 사진작가, 여고생, 조각가, 인형매니아 그리고 초대되지 않은 한 남자.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다섯 명이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의 인형사건과 무슨 관계인지 갑자기 밝혀지는데 그 이음새가 엉성하다. 하지만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상투적일지는 몰라도 힘이 있어 끝까지 시선을 잡아끈다.(짧은 런닝타임이 한몫 한 듯)
주인에게 사랑 받았지만 버림받은 인형. 그 인형이 ‘생령’이 되어 다시 찾아온다는 설정은 인간의 이기심과 고독에 대해 곱씹어 보게 만든다. 누구나 한번쯤 어린 시절 자신이 아끼던 물건이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살아 움직인다고 상상하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필자 역시도 마론인형, 사진 속의 동물들이 내 눈을 피해 내 주위를 ‘살아서’ 맴돈다고 생각했다. 유년시절의 이 기억은 순수한 어린아이의 ‘공상’으로 마냥 치부하기에는 애절한 느낌이 가득한 추억이다.
언제나 바쁜 가족들을 대신해 내 곁을 지켜주던 것은 그들이었기에 ‘죽음’ 즉, 살아있지 않다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살아있지만 온기는 전해지지 않았던 가족보다 냉기를 머금고 변하지 않는 표정으로 일관했던 그들이 많은 시간 곁에 있었으므로 그 자체로 살아있는 존재와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