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지 못하는 외로운 인간들.....★★★☆
어떻게 해서 러브돌이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갖게 되었는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어느 날, 문뜩 그렇게 된 것이다. 아마 지독한 외로움으로 인해 변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된 러브돌 노조미(배두나)는 주인인 히데오(이타오 이츠지)가 출근하는 낮에 밖으로의 외출을 감행하고, 급기야 비디오 가게 아르바이트생으로 취직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노조미는 자신이 인형이라는 사실을 같은 아르바이트생인 준이치(아라타)에게 들키게 되는 데, 그런 노조미를 담담하게 받아들여 준 준이치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
인형이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갖게 되고, 사람처럼 말하고 움직일 수 있다는 설정의 영화, 그러니깐 인형이 사람처럼 행동하는 영화라면 바로 <토이 스토리>를 떠올릴 만큼 드문 소재는 아니다. 그런데 그 인형이 외로운 또는 변태적 성인들의 섹스 파트너인 러브돌이라면 이야기의 분위기는 확 변한다. 거기에 이 영화의 감독은 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이다. 이 영화에 주목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물론 배두나가 주연이라는 것도 당연히 포함된다.
모든 영화를 다 본 건 아니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연출한 영화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게 외롭다. 사회나 어른들로부터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도 외롭고(<아무도 모른다>), 북적대는 가족 속에서도 외롭다(<걸어도 걸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공기인형>에서 그러한 외로움을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기존 작품에 비해 좀 아쉬운 지점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인형인 자신의 정체성을 감춰야 하는 노조미는 두 말 할 것도 없고, 노조미가 만나게 되는 인물들 - 히데오, 대여점 주인, 준이치, 히키코모로, 공원에서 만난 할아버지, 나이 든 여성 회사원, 트레일러에 사는 아버지와 딸, 노조미의 창조주 등 - 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지내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인물 군상은 아마도 감독이 현재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일 것이다. 파편화된 현대사회에 대한 은유. 지독한 외로움의 끝에 인간의 감성을 가지게 된 노조미가 만나게 되는 인간사회 역시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지독한 아이러니이며, 이러한 현실에 노조미는 절망한다. 그러나 영화의 끝이 절망으로 끝나는 건 아니다. 노조미의 몸에서 빠져나간 민들레 홀씨가 사람들의 마음을 채워주고 서로를 연결시키게 되기를 희망하듯 영화는 흩날리는 홀씨를 담은 채 막을 내린다.
이 영화를 보고 내가 이전에 쓴 감독의 전작 <걸어도 걸어도>의 리뷰를 찾아보니, 제목이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날카롭게 생채기를 남긴다’이다.(이 제목을 <아무도 모른다>의 리뷰에 사용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동일한 표현을 <공기인형>의 리뷰 제목으로 사용한다면 앞부분만 사용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깐 <공기인형>엔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느낌은 있지만, 날카롭게 생채기를 남기지는 못한다는 의미다. 확실히 전반적으로 기존 작품에 비해 힘에 부치며, 특히 결말부가 그러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아무리 아이들이라거나 가족이라고 해도 섣부른 화합이나 손쉬운 희망을 얘기하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날아다니는 홀씨를 보며 희망을 품는 인물들의 표정을 담고 있는 영화의 마지막은 기존 작품의 분위기와는 조금 어긋난다. 그런데 영화를 본지 몇 달이 지난 지금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그만큼 현대 사회 내지는 현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다. “나라도 희망을 얘기하지 않으면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희망을 찾는단 말인가”
※ 배두나가 옷을 벗거나 섹시신을 찍은 게 이 영화가 처음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영화의 분위기 때문인지 <공기인형>에서의 배두나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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