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 맨이 돌아왔다. 그렇다. 여기서 돌아왔다는 것은 지금 말하려는 영화가 속편이란 뜻이다. 흔히 속편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전작을 뛰어넘을 것.이다. 아니다라고 부정해봤자 속편을 보고 나온 사람들 감상의 대부분이 '전작보다 못해'와 '전작보다 낫군'으로 귀결되어지는 걸 보면, 이것은 거의 암묵적인 정설이다. 그런 기준으로 <스파이더 맨 2>를 결론부터 지어보자면, <스파이더 맨 2>는 <스파이더 맨>만큼이나 재밌고 시원하다. 다시 말해 샘 레이미는 <스파이더 맨>의 재미를 떨어뜨리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캐릭터와 스토리, 그리고 스펙타클한 화면을 선사하고 있단 말이다.
이야기는 피터 파커의 삼촌이 죽고 독립해나간 피터와 어느새 커다란 광고판에 얼굴이 찍힐 정도로 유명해진 MJ(메리 제인).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이어받아 젊은 나이에 회장이 된 해리로 시작한다. 이들 세 사람이 하나의 삼각형을 이루고 그 주변 이야기를 나머지 인물들이 채워나가는 것은 전작과 흡사하지만 여기서 새로운 인물, 악한을 맡은 옥타비우스 교수가 실은 속편의 핵심인물이다. 그는 죽어버린 그린 고블린(윌렘 데포)의 자리를 채우면서, 동시에 속편에서 가장 강력한 파워를 지닌 캐릭터로 등장한다. 이것 역시 속편의 영원한 법칙. 즉 오리지널보다 매력적이거나 강력한 힘을 가진 적수를 만들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 설정이다.
하지만 뭐니해도 <스파이더 맨>의 진수란 뉴욕의 마천루를 뚫고 종횡무진하는 스파이더 맨의 거미줄 곡예. <스파이더 맨 2>에서도 이 환상의 거미줄 타기는 어김없이 펼쳐진다. 언뜻언뜻 토비 맥과이어를 닮은 CG가 눈에 띄긴 하지만, 그것도 단 몇 초에 불과할 뿐 <스파이더 맨 2>의 거미줄 곡예는 매끄럽고 정교하며 시원하고 빠르다. 당연히 새로운 악당 닥터 옥타비우스의 기계 촉수도 스파이더 맨의 거미줄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기계 촉수의 첫 살인(옥타비우스가 수술실에 있는 장면)이 인상적인데, 사람에게 빠르게 돌진하여 잔인하게 공격하는 이 장면은 과거 <이블 데드> 시리즈를 만들었던 샘 레이미의 잔재(거의 B급 공포 영화를 보는 것처럼 피바다를 이룬다)를 보는 것 같아 반갑기까지 했다.
액션과 캐릭터가 보강된 것 이외에, 속편에서 피터는 자신의 정체성에 심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부분은 빠르고 박진감 넘치는 액션 장면과 맞물려 영화의 강약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데, 다행히도(!!) 세상은 피터가 마냥 고민만 하게 내버려두진 않는다. 그래도 역시 할머니와의 장면들은 너무 신파로 흘러간 거 같아 그 부분만 나오면 자꾸 느슨해지고, 특히 현대는 영웅을 원한다는 할머니의 일장연설은 피터의 옆집에서 가스 폭발사고라도 났으면 할 정도로 억지스러웠다. 그것도 모자라서 영화는 세상이 영웅을 원한다는 것을 어떻해서든 증명하려고 하는데, 급기야 나중엔 일반인들(피터가 돌진하는 기차를 멈춰 세우고 가면이 벗겨진 채로 쓰러져 사람들에게 노출이 되었을 때)마저 그를 영웅으로 추대하고 비밀을 지켜주는 데까지 이른다. 아니, 스파이더 맨이 영웅인 거 속편이 되도록 모르는 사람이 있었을까.
그러나 어찌되었건, <스파이더 맨> 시리즈로 샘 레이미 감독은 확실히 B급 영화의 천재악동에서 블록버스터의 베테랑이 된 것만은 틀림없다. 그는 아마 처음부터 B급 영화와 상업 영화의 특징과 흥행요소를 간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가 약간은(아니 실은 심하게) 닭살스러운 영웅주의와 옛날 같으면 꿈도 못 꿨을 최첨단 CG로 무장한 액션씬을 만들어 내고 선과 악이 확실하게 구별지어진 스토리의 영화를 만드는 것이 맘에 안들지라도 뭐 어떤가. 재밌게 잘 만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닌가. 오히려 누가 만들었어도 결국은 완성되었을 <스파이더 맨>를 차라리 샘 레이미가 만들었으니 다행 아닌가.
p.s. 하나. 토비 맥과이어는 빨강/파랑 유니폼을 입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알프레드 몰리나는 등에 촉수를 달고 붕붕 떠다니는 동안, 우리의 히로인 키어스틴 던스트는 여전히 토비 맥과이어의 사랑에 안절부절하고 악당 알프레드 몰리나에게 납치나 당한다. 액션 영화의 구색 맞추기 여주인공은 언제까지 소리만 지르는 존재로 나올 것인가. 둘. 대스타가 된 MJ는 영화 속에서 한창 연극에 몰두하는 중인데, 그 연극이 제목은 <The Importance of Being Honest>(=<정직함의 중요성>). 이것은 분명 MJ에게 자신이 스파이더 맨인지 아닌지를 밝히려는 피터의 상황을 빗댄 설정이겠다. 이 연극은 오스카 와일드 작품으로 어니스트라는 같은 필명을 쓰는 영국의 두 신사(결국 제목은 <정직함의 중요성>과 <어니스트로 지내는 것의 중요성>이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게 된다)가 같은 여성을 사랑하게 되면서 겪게 되는 정체성 혼란을 그린 코미디다. 2002년에 루퍼트 에베렛. 콜린 퍼스. 리즈 위더스푼이란 호화 캐스팅으로 영화화 된 바 있다. 셋. 그러나 사실 <스파이더 맨 2> 최고의 명장면은 가장 맨처음. 오프닝 타이틀 때 등장한다. 각각의 등장인물을 일러스트로 그려낸 이 오프닝은 약간 오버하자면 올 해 최고로 스타일리쉬한 오프닝이다. 넷. 거미줄이 나오지 않아 낭패를 본 피터가 스파이더맨 복장을 한 채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만난 사람은, 지금 home CGV에서 절찬 상영 중인 <퀴어 애즈 포크>의 할 스팍스(마이클 역). <퀴어 애즈 포크>에서 게이로 나오는 할 스팍스인지라 왠지 이 장면은 은근히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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