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티 페어>는 윌리엄 새커리의 700페이지 넘는 고전을 각색한 영화다. 여러 번 영화와 TV시리즈로 각색된 이 소설은 야심과 재능이 있고, 다소는 천박한 주인공 베키 샤프를 중심으로, 통속적이지만 신랄하게 19세기 영국사회를 묘사했다. 그러나 인도 출신 여성감독 미라 네어는 전성기를 누리던 대영제국에 매혹된 듯 치밀한 캐릭터엔 소홀하고 화려한 색채만을 덧입혔다. 무리하게 드라마를 구겨넣었지만 틈이 많은 <베니티 페어>는 베키의 붉은색 드레스 자락이 그 틈을 메워주리라 믿고 있는 듯하다.
고아 소녀 베키 샤프(리즈 위더스푼)는 기숙학교에서 만난 부유한 친구 아멜리아의 오빠를 유혹하지만 결혼은 하지 못한다. 실망한 베키는 크롤리 집안에 가정교사로 들어가고, 그 집안의 둘째아들 로든(제임스 퓨어포이)과 비밀리에 결혼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 결혼 때문에 로든은 백만장자인 고모의 유산을 한푼도 상속받지 못한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베키는 옆집에 사는 부유한 스타인 백작(가브리엘 번)으로부터 경제적, 사회적인 도움을 얻지만 그의 진정한 의도는 모른 척한다.
검은 벨벳 위의 보석 같은 이미지로 시작되는 <베니티 페어>는 짧은 워털루 전투를 제외하면 처음의 어조를 끝까지 밀고나간다. 꽃잎이 떠다니는 호수와 정원, 동양 무희로 분장한 귀족여인들의 밸리댄스, 전쟁터에서도 향기를 뿜는 무도회장. 미라 네어는 매우 세심하게 달콤한 이미지들을 창조했지만, 베키와 그 친구들에게는 그만큼의 공을 들이지 않았다. 미라 네어는 베키에게서 현대적인 여성상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당찬 여배우 리즈 위더스푼과 <몬순 웨딩>으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여성감독의 결합은 분명 새로운 해석을 기대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베키는 화술을 제외하면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 있는 어떤 재능도 없고, 자신의 재능을 장담만 할 뿐이고, 남자들 앞에서 노래부르는 게 전부다.
<베니티 페어>를 각색한 줄리언 펠로즈는 분간하기 힘들 만큼 많은 등장인물들을 직소퍼즐처럼 꼭 맞물리게 배치했던 <고스포드 파크>의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허영에 휘둘리거나 사랑의 환상에 매달리거나 경박하기 그지없는 숱한 인물들을 맥없이 놓아버리는 건 믿기 힘들 정도로 실망스럽다. <베니티 페어>는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나겠지, 라는 기대만 주고 깡총깡총 시간과 인물을 뛰어넘어 도약해버린다. 어쩌면 마지막 카드였을지도 모르는, 소녀들이 꽃을 뿌리고 코끼리가 행진하는 인도 풍경도, 그저 관광청 CF 같다는 느낌을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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