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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이모티콘과 망망대해 마냥 드넓은 행간으로 우선 위화감을 안겨주는 소위 인터넷 소설-범주 혼동의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청소년들이 동세대 독자를 대상으로 인터넷에 집필하는 로맨스 소설'이라는 정확한 개념을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긴 하지만, 편의상 인터넷 소설로 줄여 부르기로 하자―의 폭발적인 인기를 이제와 거론하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다. 십대들의 아주 소박한 유희로 출발한 그것은 어느 틈에 스타 배우들의 모습으로 휘황하게 단장한 채 스크린으로 우후죽순 입성 중. 물론 <엽기적인 그녀>와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성공에 힘입은 바 크긴 하지만, 상기한 개념의 로맨스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영화로는 엄밀히 말해 <내 사랑 싸가지>가 1번 타자 격이다.
평범한 여고생 강하영(하지원)은 연하 남친에게 차인 직후 기분 몹시 더러운 나머지 깡통을 차서 하늘로 날려보낸다. 문제의 깡통이 '싸가지' 대학생 안형준(김재원)의 외제차 안으로 뛰어들어 그의 머리를 강타하면서 두 사람의 첨예한 먹이사슬의 역사는 화려한 막을 올린다. "수리비 300만원 내놔. 없음 몸으로 때우던지." 그리하여 하영은 별 수 없이 형준이 내민 '노비계약서'에 사인하고 그의 다기능 리모콘 노예로 전락한다. 한편 청소에 레포트 대필, 비오면 우산 바치고 비 맞고 가기 등등 갖은 수모를 겪던 그녀, 수리비가 실은 끽해야 2만원 짜리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형준에게 처절한 한 판 복수를 펼친다. 그러나 실컷 부려먹고는 "짜장면이나 사 먹으라"며 적선하듯 지폐를 던지는 인간말종 형준이 당하고만 있다면 이상하겠지. '싸가지 주인님'이 이번엔 노예고딩의 과외선생님으로 일약 부임하면서 두 사람의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감정마저 이모티콘으로 바로바로 드러나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십대들은 한편 연모하는 대상에게 밤을 지새워 장문의 편지를 쓰는 대신, 카메라 달린 핸드폰을 집어들고는 모 CF 카피처럼 바로 찍어 바로 보낸다. 그 안에 고르고 다듬은 사랑의 언어가 끼어들 여지는 전무하다. 인터넷 소설이 십대를 반영하는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케케묵은 신데렐라 스토리가 어떤 젊은 세대만의 감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탓이 아니라, 그 즉각성과 일회성 때문이다. 멋진 남자를 '싸가지'로 부르는 게 새롭다고? 70년대 만화 <캔디 캔디>의 캔디스 화이트 아드레이가 테리우스 G. 그란체스터를 처음 만났을 때 그 단어를 알기만 했다면, 역시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을 게 분명하다. '이 싸가지... 얼굴 잘나서 참는다.' 위험한 남자와 말괄량이 아가씨의 로맨스란 모르긴 해도 연애소설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을 것이다.
영화 <내 사랑 싸가지>가 원작에서 가져온 것은 실은 대학생과 여고생, 혹은 싸가지와 말괄량이의 사랑이야기라는 골자 정도다. 앞서 즉각성과 일회성을 지적했지만, 그건 가치판단을 떠나 십대를 타겟으로 한 영화에 있어서는 오히려 영리한 지향점일 수 있다. 언급한 두 가지가 원작 <내 사랑 싸가지>를 위시한 소설군이 급속도로 십대의 마음속에 파고들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면, 인터넷의 인기소설에서 서점의 베스트셀러로까지 확장되며 폭넓은 인기를 얻게 한 요인은 특유의 화법과 유치할지언정 공감대만큼은 확실히 형성하는 소설 속 일상 때문일 것. 그 이유가 작가와 독자층이 일치하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사랑 싸가지> 최대의 문제점은 깊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대와 차별되는 그 세대만의 매력을 단단히 잘못 설정했다는 데 있다.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틴에이저용 영화'인 <내 사랑 싸가지>가 눈높이를 낮추는 방식은 영 불편하다. 메신저나 카메라 핸드폰 같은 그 세대와 익숙한 소품들을 잔뜩 끌어오긴 했지만, 배설물 개그와 허황된 공상으로 버무려진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며 씁쓸한 입맛을 감추긴 힘들다. 한 가지 예로 도입부에서 주인공 하영이 꾸는 말 그대로의 '백마 탄 왕자님 꿈' 같은 것에 일말의 고민의 흔적은 없다. 오락영화란 관객에게 오락을 제공하는 영화지 만드는 게 전자오락 마냥 쉬운 영화는 아닐 거란 말이다. 여기서 원작 자체의 수준을 변명 삼는 건 무용한 일이다.
한편 부모의 원수 마냥 티격태격해도 실상은 서로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이 후반부엔 결국 서로를 갈구하게 되리라는 건 스포일러라고까지도 할 수 없는 정해진 수순. 탄탄한 팬 층을 거느린 배우의 매력 탓에, 그리고 신데렐라 스토리에 어쩔 수 없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뿌리 깊은 습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스크린을 주시하긴 하겠지만, 고 3 여학생이 '사랑의 힘'으로 이룩하는 결말부의 위대한 기적 앞에 실소를 터뜨리지 않긴 힘들 것 같다. 그 기적이 뭐냐고?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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