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말란 감독의 두번째 작품. 브루스 윌리스. 영화의 내용에 대해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는 마케팅.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반전' 에 대한 추측들.. 이쯤 되면, <언브레이커블>에서 <식스센스>를 기대하는 건 어쩌면 자연스 러운 일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언브레이커블>은 <식스센스>와 다르다. (특히 반전의 범위에 있어서) <식스센스> 의 반전이 영화의 일 부, 즉 플롯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면, <언브레이커블>은 반전이 곧 영화 전체를 의미하는 셈이다. 샤말란 감독은 <언브레이커블>을 영화란 매체의 속성에 던지는 도전장쯤으로 여긴 것이 아닐까. 반전은 으례히 내러티브로 부터 배어나와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관객들마저도, 덩달아 그의 도전장 에 한방 먹은 기분이다. 그러나, 그 한방 먹은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 다. 대중예술로써의 영화에게서 배신당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기도 하지 만, <언브레이커블>은 관객과 디제시스 모두를 우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스센스>의 반전에 비한다면 <언브레이커블>의 그것은 꽤나 불친절하 다. 하지만, 둘을 비교하는 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반전' 이란 개념이 쓰인 영역이 현저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반전이란 분명 흥 미로운 도구지만, 그 자체만으론 부족한 측면이 있다. 자칫 '반전을 위한 반전' 에 치우쳐 또 하나의 틀에 얽매이는 영화가 될수 있기 때문이다.
<언브레이커블>에는 영웅과 악인이 등장한다. 하지만, 둘은 사회적 약자라 는 공통분모로 묶인다. 영웅 격인 데이비드(브루스 윌리스 분)는 삶의 좌 절을 경험한 인물이다. 아내인 오드리(로빈 라이트 분)와의 결혼생활도 결 코 순조롭지만은 않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데이비드가 지닌 근원적인 죄책 감 - 이것은 어떤 사고에서 데이비드가 죽지 않음으로써 다른 이가 죽는다 는 엘리야(사무엘 잭슨 분)의 이론에 근거한다 - 은 그를 옭아매고 있다. 이런 반영웅적 영웅의 캐릭터는, 마치 호러 영화에 등장하는 괴물의 그것 과 유사하다. <언브레이커블>이 여느 할리웃 영웅신화와 길을 달리하는 것 은 이런 점 때문이다. 영화속에서 영웅의 약점을 명시하는 것 역시 이 영 화의 특이점 중에 하나고. 암튼, 비양식적인 캐릭터는 악인인 엘리야에게 도 적용된다. 엘리야에겐 선천적으로 병(골형성 부전증)이 있다. 만화에 파묻혀 세상을 살아온 그의 정체성 찾기가 이 영화에서 또하나의 스토리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배트맨> 시리즈의 조커나 펭귄맨이 연상되는 엘리 야는, 그의 캐릭터 자체보다, 캐릭터를 드러내는 영화의 서술방법상에서 가 치를 지닌다. (샤말란 감독이 누누히 언급했던 극의 반전이 그런 서술방법 의 상당부분을 떠맡고 있다.) 또한 악인을 둘로 분류함으로써 기존의 단편 적인 선악 구분을 슬쩍 비튼다. <언브레이커블> 에서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은 캐릭터 설정에 담긴 이러한 요소들 때문이 아닐까?
미디엄 숏과 미디엄 롱숏이 주를 이룬 카메라와, 비교적 자주 등장하는 롱 테이크는 영화속 상황에 사실성을 부여한다. 또한, 의도적인 음악의 배제 는 그 자체로 서스펜스와 미스테리적 효과를 발산하고 있다. 인물을 포착 한 카메라는 배경을 흐릿하게 처리함으로써 그들이 처한 상황보다는 그들 자체에 더 관심을 보인다. 또한 상당히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영화속 등 장 인물들의 행동이나 말투는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지는데, - 데이비드와 오드리의 대화라던지, 범죄자를 목조르는 데이비드의 행동 등이 단적인 예 다 - 이는 그동안 많은 영화들이 구축해온 "환영속의 현실" 과 차이가 있 기 때문이다. 영화와 현실이 서로를 반영하는지의 여부보다 눈여겨 볼만 한 건, 영화속 현실이 어떻게 표현되었느냐는 점이다. 때론 영화가 현실보 다 더욱 리얼하다. 이는 다분히 관객들의 상상력에 의지한 측면도 있지 만, 그만큼 영화에서 과장된 부분도 없지 않다. 물론, 관객들은 그런 것 에 더 익숙하다. <언브레이커블>의 비환영적인 속성 - 이는 영화의 초반 부 열차안에서의 카메라가 보여준 지극히 관음증적인 시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그림자를 수시로 드리우는 조명에서도 발견된다 -은 이 영 화의 또다른 모티브인 만화와 결합된다. 다만 여기서 아쉬운 점은, 만화라 는 매체가 지닌 매력(이는 대부분의 영화가 지닌 매력이기도 하다)을 철저 히 외면하다시피한 부분이다. 아무튼 샤말란 감독은, 할리웃 영화가 지니 고 있는 '꿈의 은유'으로써의 영화에 어느정도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그가 스필버그와 비교되면서도 다른 건 이런 점이 아닐까 싶다.
샤말란 감독의 영화는 마치 '인간에 대한 관찰보고서' 같다. 그것은 애정 어린 시선일까, 아니면 단순한 관심일까. 분명한 것은 그가 휴머니즘에 어 느정도 동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샤말란 감독은 영화보다 사람을 중시하니 까. 사람들이 만들어낸 매체에 대한 경계는 그가 할리웃의 소수인종이기 에 가질수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언브레이커블>은 단순히 그런 '인간 에 대한 시선' 보다는 감독의 장난끼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영화를 만화 에 대한 통계자료로 시작한 것은, 만화에 얽힌 감독의 개인적인 추억이 영 화의 동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샤말란 영화의 특징중 하 나는, 아이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또한, 그 아이의 직감을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흔히 무시되거나, 영화속에서 억압받는 존재인 아이에 대한 샤말 란 감독의 역할부여는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사회적 약자가 갈망하 는 '해방' 을 뜻한다는 거창한 해석보다, 마침 다른 영역에서 사람을 관찰 하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가 아이의 눈높이와 맞아 떨어졌다는 해석이 더 가까울것 같다. 이 영화의 반전?은 마케팅이 주도한 측면이 다분하므로, 그닥 중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샤말란 감독은 이제 반전 이상의 것을 모 색할 필요가 있다. 그의 영화가 일관된 스타일을 추구하는 것처럼, 관객들 도 구축하고 있는 영화상이 있으며, 이는 좀처럼 깨지지 않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소통을 얘기하고자 한다면, 그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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