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분을 끌고 나가는 이야기와 배우의 힘....★★★☆
※ 이 글엔 영화의 중요한 설정이나 결론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유해국(박해일)은 오랫동안 의절하며 지내온 아버지 유목형(허준호)이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고 아버지가 머물렀던 시골 마을을 찾는다. 이장 천용덕(정재영)과 그를 따르는 덕천(유해진), 석만(김상호), 성규(김준배), 영지(유선) 등은 이상할 정도로 해국을 경계하고, 마을 사람들의 태도에 의심을 품게 된 해국은 자신 때문에 좌천됐던 검사 박민욱(유준상)에게 도움을 청한다.
영화 <이끼>는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연재됐던 윤태호 원작 만화 <이끼>를 영화화 한 것이다. 네티즌들 사이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이끼>의 영화화가 발표될 당시, 강우석 감독에 대한 거부감은 팬들 사이에 너무 심하다 할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당시 만화를 애독하던 네티즌들은 너무 쉬운 답을 수도 있는 박찬욱, 봉준호 감독을 가장 선호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강우석 감독을 싫어한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기존 강우석 감독의 영화와 <이끼>는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던 것이다. 단순한 스토리 라인을 직선으로 파고드는 강우석 감독의 연출 스타일과 <이끼>가 어울리지 않음은 네티즌들만이 아니라 많은 영화 평론가들조차 인정하는 문제였다.
어쨌거나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우석 감독은 <이끼>를 탐냈고, 결국 세상에 내놨다. 전문가 시사회의 반응은 완전 극과 극이었다. 좋게 보는 평론가들은 ‘강우석 최고의 작품’ ‘강우석 연출의 분수령을 이룰 작품’이라며 칭찬했고, 반대의 평론가들은 ‘원작을 해친 영화’ ‘원작의 긴장감이 사라진 영화’라며 고개를 저어댔다.(사실 유명한 원작을 영화화해서 칭찬받은 영화가 <반지의 제왕> 말고는 딱히 기억나는 게 없다. 어쩌면 이는 유명한 원작을 둔 영화의 천형일 수도 있겠다) 결론적으로 나는 두 가지의 반응이 모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163분, 거의 세 시간에 이르는 긴 상영시간이 그다지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끌고 갔다가는 건 어쨌거나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 <이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일상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만화 <이끼>가 가지고 있는 음산함, 기괴함 같은 그로테스크적 느낌은 거의 사라졌다. 일단 사건이 벌어지는 시골마을 자체의 분위기가 그러하다. 어딘가 대한민국 안에 존재할 듯한 그런 느낌. 이것이 만화를 영상으로 옮긴 결과의 문제인지, 아니면 강우석 감독의 의도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출연 인물들의 행태(!)로 봤을 때는 연출자의 의도에 가까운 것 같다. 천용덕 이장이 인터넷으로 게임 고스톱을 치면서 과자를 먹는다든지, 심지어 양치질을 하는 모습까지도 ‘아 이런 게 바로 일상의 모습이구나’라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상성의 묘사가 서스펜스의 강화엔 그다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유머 감각을 들 수 있다. 누구는 만화에선 느끼지 못한 유머에 대해 당황하기도 했다던데, 난 오히려 긴 러닝타임을 고려할 때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영화를 보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유머감각이야말로 강우석 감독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미스터 맘마>, <투캅스>, <마누라 죽이기>, <공공의 적> 등등등. 유머를 빼놓고 그의 영화를 생각할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이끼>는 강우석표 영화가 아니면서 동시에 강우석표 영화인 것이다.
그렇다면 원작 <이끼>와 영화 <이끼>는 무엇이 같으며 무엇이 달라졌는가. 사실 영화 <이끼>는 철저하게 원작을 해치지 않는, 인물의 캐스팅에서부터 (특히 천 순경은 깜짝 놀랄 정도로 똑같다) 원작의 충실한 재현에 가깝다. 만화의 뒷부분에 등장하는 이장과 유목형이 알게 되는 과정을 영화의 프롤로그로 삼은 것은 원작을 안 보고 영화를 보는 관객이 좀 더 쉽게 내용을 이해하도록 하는 배치임과 동시에 영화에서 감춰 놓은 비밀 카드를 더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라고 할 수 있다.
만화에서 그려졌던 등장인물들의 세부적인 과거사까지도 세밀하게 묘사한 가운데, 어쩌면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하는 인물인 덕천의 과거사는 고스란히 삭제되어 있다. 덕천의 과거사와 만화의 결론 부분은 가장 비현실적이고 환상적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마도 위에서 얘기한 영화의 일상성과는 괴리되어 배제된 것으로 보이며,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보인다. 다만, 만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인 ‘마을 공동창고의 전등불이 잠깐 켜질 때 보였던 네 남녀의 벌거벗은 장면’이 빠진 건 못내 아쉽다.
아무튼 만화와 영화에서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은 특정 인물과 관련되어 있다. 바로 영지. 일단 하나의 예를 들면, 삼덕 기도원 사건의 경우, 만화에선 유목형과 천용덕의 공동 범죄로 묘사되는 반면, 영화에선 천용덕은 유목형의 범죄로, 영지는 천용덕의 범죄로 묘사하며, 영지는 그 증거로 어릴 때 자신이 본 피 묻은 천용덕의 귀와 차에 실린 피 묻은 가방을 예로 든다. 만화에서와 달리 그린 건 두 가지 이유에서라고 보이는데, 우선은 좀 더 분명한 선악구도(유목형 대 천용덕)를 원했던 것 같고(연출자가), 영지의 역할을 좀 더 부각시키고자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보다 더 결정적인 건 다음과 같다. 만화에서도 그랬지만, 영화에서도 가끔 등장인물들이 그림을 그린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박민욱 검사는 유해국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하자, 설명을 가로 막으며, “그림은 내가 그린다”라고 말하며, 천용덕 이장은 천 순경에게 전화로 “복잡하게 그려서 혼란에 빠트려라”는 조언을 한다. 영화는 마치 유해국이 연 문을 영지가 닫는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마지막 장면 직전까지는 그러한 해석이 맞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으로 사실상 <이끼>는 영지가 문을 열고, 영지가 닫는 영화이며, 전체 그림은 영지가 그린 것이 된다. 영지가 그린 그림 위에서 천용덕, 유해국, 박민욱이 열심히 뛰어 다닌 형국이 된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신선함을 주는 동시에 영화를 순식간에 혼란에 빠트려 버린 주범(?)이 되고 만다. 캐릭터의 일관성과 이야기의 틀이 일거에 깨지는 것이다. 20년 가까이 한 번 찾아오지도 않고(만화에선 한 번 찾아온 것으로 묘사된다) 의절하며 지낸 아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아니 한 명이 잠깐 지나가듯 물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는 그저 변명을 하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하다) PC방의 하드를 떼어내 조사를 의뢰할 정도로 주도면밀하며 완벽주의자인 천용덕이 그러한 결정적 의문에 대해서 귀를 닫은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적 재미를 위해서? 영화적 재미가 더해졌음을 인정한다 해도 분명 그러한 트릭은 관객에 대한 공공연한 사기다.
※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끼>는 단점보다 장점이 많은 영화다. 사실 처음 이 영화를 보기 전에 가장 두려웠던(!) 점은 긴 러닝타임이었다. 거의 세 시간에 가까운 시간. 그러나 영화를 보는 동안 딱히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것도 이 영화가 엄청난 스피드로 질주하는 영화가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뻔히 알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내 시선이 계속 화면에 잡혀 있었던 건 그만큼 이야기의 동력이 강했다는 걸 의미한다. 또한 배우들의 연기를 들 수 있다. 정재영, 박해일, 유준상, 유선, 허준호, 유해진, 김상호, 김준배, 임승대 등 출연한 배우들이 모두 자신의 역할에 가장 적절한 연기력을 보여준다는 점, 어쩌면 이 점이 영화 <이끼>의 가장 큰 힘일 것이다.
※ 원작이 영화화되면서 원작이 품고 있던 한국 현대사의 날카로운 비판이 거의 무뎌졌다. 이것 또한 상당히 아쉬운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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