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캐릭터와 다분히 관습적인 전개...★★★
※ 영화의 주요한 설정 및 결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플라이스>를 보리라 마음먹었던 건 줄거리 그 자체와 함께 감독이 바로 <큐브>의 빈센조 나탈리라는 점이었다. <큐브>는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아이디어가 뛰어난 영화 중 한 편으로, 아직도 이미지가 매우 강렬하게 남아 있다. <큐브>의 가장 뛰어난 점은 장면의 잔인함이 아니라 던져진 상황 자체가 주는 잔인함이며, 이는 <스플라이스> 역시 마찬가지다.
1970, 80년대까지는 유전공학이 마치 인류의 미래를 담지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토마토와 가자미의 유전자를 스플라이스하여(splice : 유전자나 DNA 등을 접합하다) 추위에 강한 토마토를 만든다든가 뿌리엔 고구마가 줄기엔 감자가 열리는 농작물을 만든다든가 하는 것들. 거기에 유전자를 조작해 빨리 자라도록 하여, 일 년에 수차례 수확을 할 수 있는 품종을 개발하게 되면 인류의 식량문제는 완전 해결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식량문제의 본질은 수확의 양이 아니라 분배 문제에 있다. 이미 인류가 생산하고 있는 식량의 양은 전 인류가 충분히 소비할 수 있는 양임에도 한 쪽에선 버려지고, 한 쪽에선 굶어 죽어가고 있다. 현재의 체제가 유지되는 한, 분배 시스템이 개선되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양의 식량이 생산된다 하여도 여전히 한 쪽에선 버려지고 한 쪽에선 굶어 죽을 것이다.
이와 동일한 문제의식으로 유전 공학을 통한 인간 질병 치료에 대한 문제도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인간의 신체를 달고 태어나는 쥐, 인간의 장기를 품고 태어나는 돼지와 같은 새로운 종(괴물)은 인간의 질병을 고치기 위한 목적으로 유전공학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들이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 현재는 고치기 힘든 여러 질병들을 극복했다고 해서 인간 질병의 문제가 과연 사라지는 것일까? 문제는 자본이다. 여러 유전자 조작을 통해 새로운 실험을 하는 주체는 대체로 의약회사가 운영하는 사설 연구소들이다. 이들 연구의 목적은 오로지 신약 또는 의술을 개발해 돈을 벌기 위함이다. 따라서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들의 연구에 의해 불치병이었던 질병이 치료 가능하게 되었다는 얘기는 당장은 치료에 들어갈 막대한 치료비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희망이 열렸다는 걸 의미한다.
<스플라이스>의 배경도 이와 비슷하다. 두 주인공 클라이브(애드리안 브로디)와 엘사(사라 폴리)가 일을 하는 연구소는 획기적이고 인류의 진보를 가져올지도 모를 연구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이들은 연구의 진행보다는 당장의 이익이 가능한 결과만을 바랄 뿐이다. 연구소의 눈을 피해 클라이브와 엘사는 여러 동물의 DNA와 인간 여성의 유전자를 합성, 배양하는 데 성공하게 되고, 기이한 생명체 ‘드렌’이 탄생하게 된다. 드렌은 합성된 여러 동물의 외적 특징과 더불어 인간의 지성과 감성, 욕구 등을 가지고 태어난 완전히 새로운 종, 어떤 의미에선 프랑켄슈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다. 클라이브와 엘사는 처음엔 드렌을 일종의 애완동물처럼 기르다가(?) 딸처럼 대하게 되고, 성적 대상으로 나아갔다가 끝내는 끔찍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우선 <스플라이스>의 최대 장점은 여러 동물과 인간의 유전자 조합으로 탄생하게 된 드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기묘한 느낌의 눈동자, 캥거루를 닮은 다리, 전갈의 꼬리, 흥분하면 돋아나는 날개, 거기에 인간의 신체가 결합된 드렌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호와 불호의 경계선에 존재하는 자태로 등장한다. 정말 기막힌 상상력이다. 사실 프랑켄슈타인과 동일하게 드렌 역시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인 건 확실하다. 그럼에도 빈센조 나탈리는 <큐브>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을 진지하게 다룸으로써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드렌이란 존재에 대해 ‘현실감’을 부여한다.
이렇듯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드렌과 과학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는 자세,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과학자가 접하게 되는 윤리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는 건 이와 비슷한 다른 영화와의 차별 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찬가지로 대게 이런 영화들이 ‘신에 대한 도전’ 운운하며 종교적 관점으로 손쉽게 빠져 나갔던 것과 같은 우를 범하는 않는다는 것도 <스플라이스>의 확실한 장점일 수 있다. 거기에 시종일관 보는 관객의 시신경을 자극하며 불편함을 안겨주는 긴장감도 좋은 편이다.(이는 기본적으로 이종에 대한 인간의 거부정서 때문이기도 하며, 유사 가족 사이의 성적 긴장감 때문이기도 하고, 드렌이 움직일 때마다 나는 소리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스플라이스>는 ‘좋은 영화’라고 치켜세우기엔 주저되는 지점이 있다. 그건 무엇보다 기발한 상상력과 좋은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전개라든가 특히 결말이 대단히 관습적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대단히 관습적이라는 건 캐릭터 자체의 기발함과는 별개로 이야기 전개가 눈에 훤히 보인다는 점이고, 큰 틀에서 예상을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그대로 진행된다는 의미다. 아버지와 유사 딸의 일렉트라 콤플렉스라든가 그 반대 지점에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너무 뻔해 민망할 정도다. 사실 영화에서 몇 차례 성의 전환을 강조해 놓고는, 그런 결론을 내 놨다는 건 어찌 보면 아무런 속임수 없이 정공법으로 만들었다는 긍정적 해석을 가능하게도 한다. 물론 이건 반어적 의미다.
※ 영화에서 인간이 만들어 낸 괴물의 성이 변한다는 설정은 이 영화가 처음은 아니다. <쥬라기 공원>에서 과학자들은 공룡의 DNA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소멸된 일부 DNA를 양서류의 것으로 대치해 공룡을 부활시킨다. 그리고는 암컷만을 생산해 공룡의 개체수를 조절하려 하지만, 일부 공룡이 수컷으로 성 변이를 일으켜 스스로 후손을 생산하면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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