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작품을 왜 높이 평가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주관도 없이
개인적인 한국영화 최고 순위에 항상 끼워 넣곤 한다.
작품 자체가 어렵기도 하지만 한 장면 한 장면
세심하게 뜯어볼 생각 없이 이 작품에 접근하고 싶지 않을 만큼
굉장히 애착이 가는 영화인데 과연 차근차근히 봐도
찾기 어려운 그 섬세한 디테일이 놀랍기만 한 작품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복수심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다루고 있으며 감독의 이른바 「복수 3부작」의 서막을 알리는
첫 주자이다. 시곗바늘을 이용하여 인물들의 혼란스러운 추적과
시간적 개념을 암시한 <올드보이>와 한 폭의 그림처럼 퍼지는
꽃과 줄기가 마치 주인공의 복수심을 나타내는 것과 같았던
<친절한 금자씨>의 화려한 타이틀 시퀀스는 강렬한 인상과 함께
앞으로 전개될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내용을 예고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반면에 <복수>의 타이틀 시퀀스는
달랑 제목만 등장할 뿐이며 이와 같은 함축적이고
간결한 전개 방식은 이후에도 내내 계속된다.
야구연습장에서 점점 줌 아웃되어 가는 류의 씬을 보면
그의 눈빛과 몸짓은 불안하게 떨리고 있어
배트를 휘두르는 모습이 매우 서툴러 보인다.
후에 야구연습장에서의 배트를 휘두르는 류의 씬이
한 번 더 나오는데 이번에는 이전과 대비되는 입을 굳게 다문
차가운 표정인 류의 얼굴이 줌 인되어 오며 그의 불타오르는
복수심이 어느 정도인가 짐작할 수 있는 변화된 심정을 알 수 있다.
시체 부검실에서 딸의 시신이 해부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진의 씬을 살펴보면 동진의 안타까운 흐느낌과
시신이 부검될 때 나는 괴음만 들릴 뿐이다.
역시 후에 부검실에 있는 동진이 한 번 더 보이는데
이제 그에게 시신 해부라는 것은 하품이 나오는
따분한 것 따위가 되어버렸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동진의 섬뜩할 정도로 차가워진 심정 변화를
엿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씬을 통해서 작품 속 인물들의
심정 변화를 말하고 있는 방식이 굉장히 간결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군더더기 없는 생략의 미학은
상징적 의미가 담긴 다른 씬에서도 빈번히 보인다.
류의 아파트 앞에 초록색 소파와 보라색 소파가 나란히
정렬해있고 류는 초록색 소파 위에 앉아 있던 노인의
흘러내린 바지춤을 치켜 올려준다. 초록색 소파는 류를,
보라색 소파는 환자인 누나를 상징하고 있으며
할아버지 역시 류가 투영된 일종의 도구라고 본다.
누나를 돌봐야 하는 입장인 류이지만 정작 자신이
바지춤도 치켜 올려줘야 하는 처지, 즉 운명 앞에서
계속 철부지같이 행동하는 인물이라고 설명하는 듯한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장면이다. 후에 누나가 죽은 뒤
이 소파들의 위치가 서로 바뀌는데 이번에는 초록색 소파
안쪽 사이로 콘크리트에 핀 꽃 마냥 꽃이 피어 올라와있으며
마치 류의 가슴 속에 핀 누나를 위한 복수의 꽃묶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류가 장기매매 사기단에게 장기를 팔러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씬을 보면 어두운 실루엣으로 표현되어
점점 멀어져 가는데 마치 류의 앞날이 그와 같은 어두운
소용돌이처럼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듯하다.
일정한 화면이 제시된 후 그에 대한 해답을 보여줄 때의
표현 역시 불친절하다 싶을 정도로 미니멀하다.
영미의 “너 자른 게 저 자식이냐”란 대사를 통해서
류가 지장을 찍었던 서류가 퇴직서 이었음을 인식할 수 있고,
입에 피 칠갑을 한 채 무언가를 먹고 있는 류가
클로즈 업 된 씬 이후 장기매매단의 신장을 도려내간 류를
조심하라고 동진에게 알려주는 형사의 말로써
류가 먹고 있던 것이 신장이었음을 알게 된다.
영화 종반에 강가에서 동진의 잠수와 함께 류가
갑자기 허우적대는데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궁금해 하는 찰나에 류의 갈라진 아킬레스건이 비춰진다.
이런 식으로 관객이 장면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으면
답은 슬며시 뒤에 내주는 과감한 생략,
감독은 마치 관객과 일종의 게임을 하듯
철저한 절제를 통해 최소의 것들만 보여주려 하는 듯하다.
지금까지 예로 들었던 함축적이고 간결한 표현들은
작품의 건조하고 정적인 분위기 형성의 핵심이며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간과할 수 없는 큰 부분이다.
<복수>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 있어서 생략과 축소가
바탕이 되어 있다면 영화 내적으로는 현대인들의 비인간적인
자화상과 계급간의 갈등에 대한 불만이 짙게 깔려져 있다.
영화 초반 류가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은 현대인들의 인간성
상실에 대해 가장 깔끔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새빨갛게 데워진 용광로가 뜨겁게 열을 내고 있는 공장 안,
철저히 각자의 분업에만 열중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분주함은
용광로(기계)가 오히려 인간의 마음보다 뜨겁다는 걸 말해준다.
그렇게 모든 노동자들이 류와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일말의 소통 없이 마치 기계보다 더 기계인 듯 일만 하다가
근무종료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분주히 퇴장한다.
류와 함께 퇴장하는 다른 노동자들의 무기력하고
무표정한 정면을 쫓는 롱 테이크 장면이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두웠던 공장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바깥의 눈부신 햇살은
그들의 눈을 사정없이 쬔다. 그렇게 아무 대화도 없이 뿔뿔이
흩어지는 류와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감정 없는
기계의 얼굴이 오버랩 되는 게 어색하지 않다.
퇴직서에 지장을 찍을 때 류는 약자로,
공장 간부들은 다소 부도덕하게 묘사되는 뉘앙스가 풍기는데
계급간의 갈등에 대한 냉소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동진 앞에서 커터 칼로 할복시위를 하는 팽 기사와
사장 딸들이 들고 있는 화사한 색의 풍선의 대비를 통해서도
계급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영화 내내 반정부적 태도를 보이는 영미의
"머리가 두 개인 남자가 있었는데 두통 때문에 머리 하나를
총으로 쐈다"는 대사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좌파와 우파,
강자와 약자 이들 각 두 개 중 어느 하나도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견 피력임을 알 수 있다.
작품의 가장 큰 주제인 '복수'에 대한 감독의 태도는
복수의 주체와 객체가 되는 인물들을 어느 쪽도
피해자가 아니라는 동등한 위치에서 어떠한 연민의 시선 없이
바라보며 복수라는 인간의 원초적 본성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한다.
류의 누나가 고통으로 신음할 때 옆방의 젊은이들이
그 신음소리를 성적으로 재해석하여 자위하는 씬을 보면
고통과 쾌락이란 것은 해석하기에 다르나
결국엔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수를 당해 고통 받는 피해자나
복수 성공의 쾌락을 맛보는 가해자나
결국 같다고 보아 복수가 성취되는 순간
금세 복수를 당하게 되는 장면이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이처럼 쾌락이 결국 고통이 될 수 있다는 해석에 이르게 되면
복수라는 것은 나쁜 감정 혹은 허무한 것이라고 단정 짓게 되는데,
이에 대한 부가적 설명으로 복수의 어리석은 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엔딩장면을 들 수 있다.
가슴팍에 칼로 꽂힌 판결문을 읽으려는 동진의 힘겨운
중얼거림과 표정을 통하여 복수의 결과는 결국 이렇게
우스꽝스럽고 허무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타이투스 앤드러니쿠스>
역시 피로 물든 처참한 복수의 결과를 보여주는데
그러한 결과로 이끄는 복수임을 안다고 하더라도 내 딸의
찢겨짐을 눈앞에서 보게 되면 그 말로가 어떻든 간에
복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감독 역시 인터뷰를 통해 만약 동진의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그 살인마를 지옥 끝까지 찾아가서
갈아 마셔 버릴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쁜 줄 알지만 할 수 밖에 없는 탈 이성적 감정,
복수는 복수를 부르는 악순환의 딜레마,
그것이 이 작품이 보여주는 복수라는 인간 본성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아이러니함이다.
'아이러니'의 코드는 작품 곳곳에 퍼져있는 중요한 장치이다.
아이러니를 가장 잘 나타내는 인물은 동진이다.
류를 죽이겠다는 끔찍한 다짐을 딸 방에 있는 튜브 안에서
전화로 형사에게 전하는 씬에서는 냉혹한 감정과
그 예쁜 공간이 어울리지 않는다.
강물에서 동진이 류를 죽이는 장면을 보면,
착한 놈 인줄 아니까 너 죽이는 걸 이해해달라는
동진의 말부터가 상식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류가 허우적거려 튀겨대는 강물을 맞는 동진의
당황한 표정을 통해 전혀 그럴 것 같지 못한 사람이 극도로
잔인한 방법으로 살인을 행한다는 아이러니까지 볼 수 있다.
류 역시 성공적으로 유괴비를 받아내 행복을 느껴보기 무섭게
누나가 자살해 있다는 아이러니를 겪는다.
또한 영화 속에서 가해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을 살펴보면
류에게 사기를 치는 장기밀매업자, 동진의 딸을 유괴하고
본의 아니게 죽게 놔둔 류, 팽 기사를 정리 해고시켜
결과적으로 그의 가족을 죽게 만든 동진,
류와 영미 그리고 중국집 배달부까지 죽이는 동진 등
가해자들의 여러 가해 사실이 서로 얽히며 동시다발적으로
그들 자신이 피해자가 되어가는 아이러니가 발생함을 알수있다.
뇌성마비 장애인이 차 번호를 기억해냈다는 점,
장기매매단의 여자가 아들의 강간을 아무렇지 않게 방관하고
있는 점 등 많은 부분 역시 아이러니하여
이 세계 자체가 아이러니가 아닐까 하는
사회적인 고뇌에 파묻힌 감독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즉 이 모든 우연과 현실의 운명 속에 노출된
나약하고 나태한 인간 군상에 대한 감독의 회의가
전체적으로는 복수라는 추악한 감정을 통해 표출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현 세태에 대한 회의의 해답을
'복수는 나의 것'이란 제목이 인용된 성경 구절 중
로마서 12:17절의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에서
찾은 것이 아닐까란 추측을 해본다.
영화 끝부분의 복수의 고리를 최종적으로 끊는
영미의 당원 동지들은 마치 '원수는 내가 갚겠다'고 말한
신처럼 동진을 심판하고 유유히 사라진다.
앞서 언급했던 죽어가는 동진의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종교적 물음에 가까운 억울함을 호소한다.
왜 착하게 살아온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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