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
아름다움은 항상 사라지고, 퇴색하며,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여인의 미소, 사랑, 이상, 우정....
시는 그것들에 조금이라도 더 긴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초라한 몸부림이다.
파블로 네루다가 떠난 쓸쓸한 시골 섬. 그 대문호가 떠나면서 모든 아름다움을 다 가져가버렸다고 생각하던 우편 배달부 마리오는 어느 날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름다움은 사방에 있었다.
파도소리, 바람소리, 그물 끌어올리는 소리, 종소리, 밤하늘의 별 기타등등..
마리오는 결국 네루다가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바로 그 눈을 갖게 된 것이다.
흘러가버리는 그것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녹음기로 기록해놓으려고 했던 마리오의 행동은, 그런 의미에서 네루다의 시 쓰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게 아름다움은 시의 몸을 빌어 자신의 짧은 생명을 연장시킨다.
미자는 그런 네루다의 눈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렇게 추잡한 오늘의 세상 속에서 과연 아름다움이 존재할까. 설겆이통은 그냥 설겆이통일 뿐인데.
아름다움을 구하는 미자에게 사람들은 500만원을 구한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나무를 보지 못하고, 사과를 보지 못한다.
손자는 식탁위 희진의 사진에 흠칫 놀라지만 곧 별것 아니라는 듯 행동한다.
사람들이 한번도 사과를 본 적이 없듯이, 손자는 한번도 희진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추함도 볼 수 없다. 손자와 친구들은 얼마나 해맑게 오락실에서 놀고 있던가. 낭송회에서 음담패설을 늘어놓던 형사는 과연 시를 모독한 것일까, 시를 볼 준비가 된 것일까.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이야기하라고 하자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이야기 한다.
아름다움이기도 했지만, 슬픔이자 고통이기도했다.
미자는 아름다움을 위해 추함을 택한다. 추함을 보지 못하고 아름다움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 두 단어는 같은 말이니까.
딸과의 친구같은 아름다운 관계를 위해
손주 녀석의 입으로 밥이 들어가는 아름다운 장면을 위해
치매노인때문에 추해지지 않는 아름다운 가정을 위해
미자는 자신을 희생한다. 속죄양이 되는 것이다. 모든 추함을 안고 사라질 속죄양.
모든 추함을 짊어진 미자는 비로소 손자를 순결하게 만들 수 있다. 손발톱을 다듬고, 목욕을 하고, - 이발은 한지 얼마 안됐으니까 괜찮고, - 세수할때는 건성으로 하지 말고 귀 뒷쪽까지 깔끔하게 해야한다. 손자는 죄값을 치루고 순결해져야한다.
우리는 순결의 순교자 성녀 아그네스(아녜스)가 되어야 한다.
창녀가 되어 순결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름다울 수 없다.
살구가 땅에 떨어져야만 생명은 시작될 수 있으니까.
미자의 여정은 희진이 걸었던 길을 뒤쫓는 성지순례이다.
그렇게 미자는 희진이 된다. 그녀처럼 정결해지고 아름다움을, 시를 완성한다.
네루다가 가르쳐준 시 쓰는 방법은 '은유'이다.
하지만 명사를 잃어버리고, 곧이어 동사도 잃어버릴 시인은 도대체 무엇으로 은유를 해야 할까.
마리오는 노트 한가운데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넣는다. 미자는 내리는 빗방울로 메모장을 채운다.
마치 진짜 아름다움은 지저분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듯이. 그게 진짜 은유라는 듯이.
그저 흘러가버리는 강물 속에서 아름다운 것은 '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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