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만나는 것은 기쁨이다. <밀양>이후 3년만에 <시>와 함께 돌아왔다.
한국 영화계의 큰 별 윤정희씨가 캐스팅되어 화제가 되었고, 칸느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랐다는 것으로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으례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들의 작품들이 세상과 만나는 방식은 전형화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작년엔 박찬욱의 <박쥐>, 봉준호의 <마더>가 그러했다면 올해는 임상수의 <하녀>와 함께 이창동의 <시>가 단연 한국영화계의 바람몰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의 배경음악이 좋다.
이 영화는 배경음악이 없다. 오프닝부터 클로징까지 단 한곡의 OST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배경음악을 자연의 소리로 대체한 것이 인상깊다. 물소리로 시작해서 물소리는 끝나는 시종일관의 묘미가 있고 바람소리, 새소리, 풀벌레소리 등이 중간 중간 배경음악이 되어 영화를 덮는다.
윤정희의 영화다.
솔직히 한국 영화의 큰 별이라고 칭송되고 있는 윤정희의 이전 작품을 본적이 없다. 어렸을때 설령 본 적이 있었더라도 기억엔 없다. 그런 그의 연기를 처음 보면서 대사가 서툴다는 생각, 다른 조연에 비해서도 연기력이 아쉽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도 과연 이 역할을 맡을 배우에 윤정희 만한 연기자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최대의 미스캐스팅이라고 혹자들은 얘기하는데 반대로 가장 적절한 캐스팅이었다고 보고싶다. 현실의 고단함과 작시세계의 달콤함을 과욕을 부리지 않고 나름의 연기력으로 영화전반을 끌고 가는 것은 그가 왜 윤정희인지를 증명해 보이고 있다. 분명 윤정희 영화 인생의 공식적 1호 필름은 <시>가 될 것이다.
조연배우의 연기력이 살아 있다.
병중에 있으면서도 절친사이인 윤정희와 함께 출연한 김희라의 연기-연기라고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리얼함-와 감초 배우 안내상, 손자역을 맡은 이다윗은 물론, 문학강사로 나온 김용택 시인의 연기는 빛을 발한다. <시>는 시가 소재가 아닌 시가 주제인 영화다. 시는 인생을 담는 것이고 인생이 곧 한편이 시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조연의 역할이 매우 컸다. 시 강좌 회원들과 시낭송회 회원들의 능청스런 연기는 건조한 영화에 가습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창동의 영화, 점점 어려워 진다
지금까지 써내려온 이창동의 필모그라피 가운데 이 영화가 가장 어렵다. 그토록 어렵게 봤던 <밀양>보다도 더 큰 주제의식과 함께 영화의 넓이와 깊이가 더해진 느낌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있게 만든다. <밀양>이 피해자의 입장에서 본 윤리의식을 건드렸다면 <시>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본 윤리의식을 담았다. 미자의 죽음은 윤리가 무시되거나 책임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이 시대에 최소한의 희망을 주는 고결한 결단의 산물이다. 이것을 느끼는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 울림이 된다.
깐느는 이 영화를 택할 것인가.
이 영화는 시를 주제로 삼았고 또한 소재로 삼은 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아름답거나 재밌는 시들이 얼마나 제대로 번역되어 영화제 심사위원에게 어필이 될런지가 수상 여부의 관건이 될 것이다. 국어의 아름다운 표현들이 번역과정에서도 그대로 살아난다면 수상의 확률은 한층 높아질 것이다. 설령 수상을 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은 없다. 내게만은 위대한 작품이기에..
퍽퍽한 이 시대 한줄기 소망의 영화
어려운 소설을 한 장 한 장 어렵게 넘기듯이, 난해한 시 한편 읽고 멍때리듯이 영화를 공부하듯 숙제하듯 관람했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killing time), 또는 영화를 즐기기 위한다면 추천하고 싶은 영화는 아니다. 두시간 반짜리 문학강의를 듣는다는 마음으로 감상한 이 영화는 너누 매말라 감동과 눈물이 없는 이 시대에 한줄기 소망과도 같은 영화다. 두시간 반의 상영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생각해야 하는 이 영화에 박수를 보낸다. 이창동 감독과 윤정희 선생께 경의를 표한다. 아직도 영화를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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