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나고 떠오르는 두가지 생각은,
첫째, 어렵다. 마치 셔터 아일랜드를 봤을 때 처럼, 난해함이 있었다.
둘째, 이 영화가 어떻게 아바타를 누르고 아카데미상을 휩쓸 수 있었을까? 이다.
미국인들의 정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향했다.
늘 그렇지만 귀가 길에 하나 하나 되짚어 보면서 영화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왜 이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휩쓸 수 밖에 없었는지도.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바타는 타 국가 혹은 부족이 받는 부당한 대우를 다룬 영화이지만,
허트 로커는 미국 자신의 상황 혹은 처지를 다룬 영화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소재가 중대하기 때문에
아바타의 흥행과 기술력을 압도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제임스 중사는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니다.
미국이란 한 나라를 상징하는 캐릭터다. 전쟁은 마약이다 라고 방점을 찍으면서 시작하는 것은
전쟁에 중독된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감독의 진단이다. 미국은 한국전, 베트남전, 걸프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등등 적잖은 전쟁을 치뤄왔다. 이 전쟁들은 미국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것일까? 아니면 괜한 참견이었을까..
다른 전쟁은 뒤로 제쳐두고서라도 아라크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에 가담한 미국에 대하여 감독은 몇가지 씬들으로 묘사한다. 가령, 사라진 소년의집이라 여기고 어느 집에 잠입한 제임스 중사가 모질은 집 주인 부인에게 혼줄나며 쫓겨나는 모습, 흥분한 제임스 중사의 명령으로 불필요한 작전을 펼치다가 결국 동료를 다치게 하는 사례, 등은 미국이란 나라가 불필요한 전쟁을 일으키고 참전 자국민을 위험으로 끌어들인 전쟁광의 이미지를 입고 있다는 비판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부분으로 보여진다.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이 사건은 이라크에서 미군이 현지 반란군과 교전하며 격는 현실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동일하게 미군의 이라크전을 다룬 최근의 영화 '그린존'이 폭로한 것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이유 중에는 자국의 이익이 크게 자리 한다 는 것이다. 이와 다르게 허트로커는 정치적 음모론은 배제한채, 마약과 같은 전쟁 중독에 걸린 정신적 문제로 접근한다는 것이 새롭다. 제임스 중사는 자신을 끊임없이 전쟁이라는 위험에 노출시키는 이유를 자신도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800여 차례에 걸친 폭탄제거와 총격전을 격은 그에게 전쟁은 더이상 위험한 행위가 아니라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일상이다. 금방이라도 떨어지면 죽을 외줄타기처럼 사선을 앞두고 있지만 오히려 그것을 컴퓨터 게임하듯 즐긴다. 정상인은 전쟁의 공포를 격으며 집으로 돌아가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고자 하겠지만, 제임스 중사는 전쟁터에서 돌아와 아내와 아들을 만나는 것은 잠시일 뿐, 다시 전쟁터로 떠난다. 보통 사람들은 피 흘림을 끔찍하게 여기지만, 피에 중독된 사람은 그 피 흘림을 즐긴다. 소름끼치는 무서운 현상이지만, 사람의 정신은 자신을 무엇으로 길들이냐에 따라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형성되기도 한다. 전쟁에 중독된 제임스중사가 그러하고, 전쟁에 목말라하는 미국이란 나라가 그러하다.
제임스 중사는 아직 말 못하는 어린 아들에게 어른이 되면 어릴 때 좋아하던 많은 것들이 더이상 가치있게 여겨지지 않고, 한 가지만 남는다고 말한다. 이 말 자체는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릴적 중요하게 여기던 구슬과 딱지는 이제 아무런 가치가 없다. 지금 가치 있게 여기는 어떤 것도 언젠가 헛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고 성숙한다는 것은 자신이 그토록 갖고 싶었던 많은 것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 작업이다. 동시에 상황과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가치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제임스 중사가 선택한 그 하나의 가치는 전쟁터에서 폭발물을 제거하는 일이다. 폭발물에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으니, 누군가는 그것을 제거해 주는 일도 의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제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 계속 전장에 머물고자 한다면 그것은 가치에 대한 성숙한 선택일 수 있을까. 누군가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의 범주를 넘어서서, 전쟁과 폭탄제거 자체에 대한 중독이다. 이 영화는 여자감독이 만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아내와 자녀를 버리고 폭발물제거를 선택한 남자가 얼마나 철없이 보일까. 세계경찰국을 자처하며 전쟁을 꿈꾸는 미국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어 보일까.
가장 잔혹한 장면으로 꼽는 것은 한 아이의 시체속에 폭탄이 설치된 장면이다. 제임스 중사는 시체속에 손을 넣어 폭탄을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정신과 삶에 엄청난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전쟁은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죽이게 되어 있다. 제임스 중사는 평화로운 세상을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다. 피에 굶주린 야수처럼 전쟁안에서 만족을 누리며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숱한 폭발물을 불발탄으로 만들어버렸지만, 언젠가 자신도 폭발물과 함께 파멸할 것이다. 사실, 살인중독에 걸린 자의 삶은 이미 죽은 자의 삶이다. 살아도 산게 아닌 것이다. 제임스가 제거해야할 가장 위험한 폭발물은 바로 자신안에 설치된 전쟁중독이라는 폭발물이다. 자신과 전쟁하며 자신을 이겨내야 한다. 가장 먼저 자신이 구해야할 대상은 저 멀리 바그다드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이다. 미국도 그러하다. 무기판매를 위해서는 결코 평화로운 세상을 바라지 않을 것 같은 나라, 미국은 스스로 폭약을 떠안은 시체와 같다. 칼로 승한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처럼, 전쟁광 미국의 미래는 암담하다. 타국을 정의롭게 하려 하기보다 먼저 자국을 정의롭게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의 미래는 언제 자신안에 있는 폭탄이 터질지 모를 시한부 인생과 같을 것이다. 미치광이의 나라 미국에서 이런 지적이 있는 영화가 나왔다는 것은 불행중 다행이라 여긴다.
우리는 어떤 중독에 처해 있을까. 중독은 전쟁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제임스나 미국의 상황만큼이나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장 먼저 스스로를 진단해 볼 것은 우리의 마음에 두고 있는 단 하나의 가치가 진정한 가치인가 라는 질문이다. 이준익 감독의 '구르믈 벗어난 달처럼'은 이 질문을 주제로 하고 있다. 우리가 꾸는 꿈이 구름과 같이 사라져버릴 헛된 꿈인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달처럼 진정한 가치인지를 묻는다. '허트로커(The hurt locker)'라는 말은 '심각한 부상'을 의미한다. 자신이 심각한 부상의 상태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면 거기서부터 희망은 시작될 것이다.
영화상징주의 & 영화치료
http://www.cyworld.com/Moviesymbolism/3938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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