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해 그렇게까지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많은 뮤지컬 영화를 접한 것도 아니지만, 줄거리나 뮤지컬로 옮기려고 하는 원작을 살펴보고 “아. 이 정도면 뮤지컬로 만들 수 있겠구나. 이건 뮤지컬로 옮겨질 수 있는 소재구나” 정도의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있어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1963년작 8과 2분의 1을 뮤지컬로 만든다는 아이디어자체는 불가능하다고 밖에 생각되어지지 않았습니다.(8과 2분의 1을 가지고 만든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영화화한다고 말하지만, 그것도 결국 이 영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를 가지고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8과 2분의 1을 뮤지컬화한다고 해도 상관없을 겁니다.) 8과 2분의 1 자체가 워낙에 탁월한 예술적 성취를 거둔 위대한 걸작 중 하나일 뿐더러, 현실과 꿈과 환상을 넘나드는, 1~2번 보고 이해한다는 걸 엄두도 낼 수 없는 작품을 뮤지컬로 만든다니... 이게 가능한 이야기일까 하는 의구심부터 먼저 들었습니다. 일단 감독인 롭 마샬은 저번에 뮤지컬 시카고를 가지고 매우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냈으니(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했으니까 그만하면 좋은 결과겠죠.) 괜찮을 것 같고, 영화 고르는 눈이 엄청나게 까다롭기로 잘 알려진 다니엘 데이 루이스를 필두로, 어떠한 영화에서도 이룩해 낼 수 없는 엄청난 여성 캐스팅을 이루어낸걸 보니, 그리고 예고편마저 엄청나게 좋았으니, 이거 잘만 만들면 걸작인데 왠지 걸작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무리한 기대심을 가지고 몇 달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고 개봉 날 조조로 확인한 결과, 영화 자체는 스토리의 힘은 거의 없는데 1억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예상치 못한 볼거리들로 가득하기만 한. 실망스럽지만 스펙터클한(?) 영화였습니다.
유명한 영화감독인 귀도는 그의 아홉 번째 작품(제목 나인의 의미가 이겁니다.)인 이탈리아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계속해서 고뇌하고 생각하다가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괴로워합니다. 영화 찍을 준비도 거의 다 된 상황에서, 그는 결국 기자회견장에서 그의 다음 영화에 대해 쏟아지는 질문 공세를 피해 도중에 기자회견장을 탈출(?)하여 휴양지로 갑니다. 거기에서 그는 영감을 떠올리려고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는 그의 아내, 정부, 신문 기자, 의상 디자이너, 여배우, 그의 엄마, 과거 학창 시절에 해변에서 만났던 창녀를 만나거나 상상하지만 영감은 도무지 떠오르질 않고, 그에게 문제가 되는 그의 매니저와 그와 영화 찍는 모든 제작진들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그가 있는 곳을 알아내 단체로 옮겨오고, 주위의 여자들은 그에게 영감을 주기는커녕 그를 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밀어 넣습니다.
솔직하게 제가 영화를 볼 때 가장 궁금했던 건 첫 장면을 어떻게 해 놓았을까 였습니다. 원작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바로 오프닝 장면이었으니까요. 그 꿈 장면에서 귀도는 차를 타고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차는 꽉 막히는 도로에 갇히고, 그의 차에서는 연기가 납니다. “여기서 내 보내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마치 그를 억압하는 괴로운 현실과 그의 주위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워지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발목에는 연줄이 묶여있고, 지상에서는 이제 그만 그를 끌어내리라고 합니다. 주인공의 현재 심리 상태를 상징적이고, 압축적으로 표현했던 원작의 오프닝과는 달리, 나인의 오프닝 장면은 그저 “이런 여배우들이 나온답니다” 라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수준의 장면이었던 것 같습니다. 홀로 세트장에 들어가 있는 귀도는 그의 다음 영화에 대해 고뇌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여배우 클라우디아가 나타나 그의 입에 키스하는 걸로부터 시작해서 약간 신비로운 음악과 함께 이 영화에 출연하는 모든 여배우들이 화면에 등장합니다. 그들이 다 나오고 나면, 그는 꿈에서 헤어나와 다시 현실로 돌아갑니다. 도대체 뭘 보여주려는 거였을까요? 그의 창작적 고통을 여자들에게 의지함으로 해결하려는 거였을까요?
이 영화를 보는데 있어서 그저 엄청난 배우들의 모습을 보기 위함이라면, 분명히 이 영화는 제 값어치를 하는 영화가 될 겁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이걸로 최소한 30%는 만족할 겁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 마리온 꼬띨라르, 페넬로페 크루즈, 니콜 키드먼, 케이트 허드슨, 소피아 로렌, 퍼기까지... 어떻게 이런 캐스팅이 가능한가 의아스러운 캐스팅을, 어떠한 감독의 영화에서도 거의 불가능 할 것만 같은 캐스팅을 뮤지컬에서, 그것도 열정적인 춤과 노래가 있어야만 하는 장르에서 이룩해냈으니, 적어도 이 영화는 이러한 캐스팅만으로도 충분히 성취했다고 할 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배우가 다 좋았는가? 라고 묻는다면 글쎄올시다 입니다. 좋은 부분도 나쁜 부분도 있습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부터 시작해보죠. 나의 왼발에서 정말 대단한 연기를 보여주었고, 21세기 들어서서 갱스 오브 뉴욕,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그야말로 머리가 멎을 것만 같은 엄청난 힘을 지닌 광기 연기로 영화 전체를 압도했던 다니엘 데이 루이스였지만, 뮤지컬에 오고 나서는 그러했던 이미지가 완전히 박살났습니다.(울부짖는 장면 하나에서만 저는 다니엘 플레인뷰를 연기했던 그의 모습을 잠깐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연기는 여전히 좋고 몇몇 장면에는 힘이 있으며, 예상치 못한 노래 실력과 춤 실력까지 보여주셨으니, 전작에 비할 바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더라도 장르 영화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도 그의 밝은 빛을 발하진 못했습니다. 이건 명백한 사실입니다.(다시 다니엘 플레인뷰로 돌아가줘요.)
그렇다면, 문제의 화려한 여배우들은요? 일단 많은 여자들이 나옵니다. 그건 좋지요. 그러나 너무 많다보니 출연 분량들이 정말 안습입니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는 모두 다 나오니 그 장면들은 제외하고, 나머지 장면들 중에서 정말 노래 한 곳 부르는 것만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케이트 허드슨과 퍼기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여기에서 그들의 노래는 정말 좋았습니다.(특히 퍼기의 Be Itailan은 정말 머리가 띵해졌죠. 와우.) 니콜 키드먼이 연기했던 클라우디아 역시 캐릭터 자체는 좋았는데 차지해야 할 비중에 비해 실제 극의 비중은 정말 적습니다. 이 모두는 다 감독의 연출력이 부족했던 이유입니다. 가장 섹시했던 건 페넬로페 크루즈였습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작품들에 나왔던 그녀의 모습에 너무 익숙해 있던 나머지, 그녀에게 이러한 섹시한 이미지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치도 못했습니다. 정말 침을 질질 흘리며 봤습니다. 그러나 제일 좋았던 배우는, 만장일치로 마리온 꼬띨라르입니다.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했던 귀도의 아내의 캐릭터를 그야말로 완벽하게 표현했습니다. 자신의 슬픈 내면의 고통을 드러내는 노래와 마지막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강하게 유혹하는 모습까지, 그녀의 연기는 보는 이의 마음속에 들어올 수 있는 유일무이한 것으로, 그야말로 완벽했습니다.
이러한 배우들의 화려한 무대에 대해, 많은 이들이 후반부로 갈수록 지루하고 지겹다고들 하시는데, 최소한 저는 지루한 것까지는 느끼질 못했습니다. 또 이런 무대가 나오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어도, 그 무대들에는 우리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매 노래와 무대마다 다른 배우들이 나와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니, 그나마 견딜 만 했죠.
정말 큰 문제는 이야기입니다. 저의 첫 예상으로는, 그리고 이론적으로 옳은 것은 원작이 훌륭함을 넘어서는 작품이니, 원작의 스토리를 살려내기 위해 무대가 아예 없는 것은 뮤지컬이기 때문에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무대보다는 스토리텔링 위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 영화는 그 이론을 철저히 파괴합니다. 1억 달러 들어갔다던 세트와 뮤직비디오 같은 무대만 감독이 보여준 유일한 장기이자 연출입니다. 시카고에서는 노래와 이야기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최상의 효과를 냈지만, 여기에서는 노래 사이에 이야기를 빈약하게 끼워 맞추고 이 노래를 부르기 위해선 이런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진행해나갔습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말한다면, 창작의 부재로 고통스러워하던 감독이 영감을 얻으려고, 그것도 여자들로부터 얻으려고 하다가 여자들에게는 치이며 살고, 정리도 안 되고, 거의 다 떠나가고, 그래서 그냥 흐느적흐느적하다가 결국 자신이 중요하다, 자신을 믿고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뭐 이 정도 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에게만 매달렸다가 그러 교훈을 디자이너 말 한마디에 갑자기 깨닫는다니, 그것도 2년 동안 모든 걸 다 버리고 헤맸는데, 그게 말이 됩니까? 원작 스토리가 그렇게도 유치하고 얕았습니까? 그건 분명히 아니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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